한병철이 말하는 투명사회와 매끄러움을 향한 욕망
현재 우리는 면도를 넘어서는 제모를 목격한다. 겨드랑이나 팔다리의 털을 제거하는 행위는 이제 당연하게 생각된다. <색, 계>에서 탕웨이의 겨드랑이를 보고 논란이 일었다는 사실은 매우 유명하다. 그것이 한 배우의 실수였는지, 취향이었는지, 아니면 철저한 고증이었는지를 둘러싸고 다양하고 진지한 의견이 오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일까, 여성의 겨드랑이 제모가 당연시되는 것 역시도 가부장제 사회에서 경험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아닌가라는 의심이 싹텄다.
사실 털에 관한 곱지 않은 시선이 반드시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 시작이 조금 늦기는 했으나 남성의 겨드랑이와 다리에 난 털도 제거하면 좋은 대상으로 여겨진다. 민소매를 입었는데 겨드랑이 털이 무성한 남성이나 반바지를 입은 남성의 다리털이 제법 검다면, 그것도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한병철은 우리 시대가 매끄러움을 추구하는 사회라고 말했다. 매끄러움은 장애물이 없다는 의미와도 같다. 장애물이 없으면 부정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좋아요만 존재하는 사회를 향한 일침을 가한 것이다.
물론 한병철이 주장하는 사회의 모습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유튜브 채널에서도 좋아요와 함께 싫어요를 표시할 수 있으니 말이다. 형식적으로는 부정성의 표출도 가능하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애초에 좋아하지 않는 영상을 시청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싫어요가 좋아요를 앞서는 영상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결국 싫어요를 누르는 대신 싫어하는 영상을 피함으로써 유튜브 시청자들은 그들만의 매끄러움을 유지한다. 그리고 유튜브 자체도 시청자들을 위해 그들의 기호에 맞는 영상만을 추천목록에 올려놓는다. 인공지능의 발달은 매끄러움의 과잉을 더욱 부추기는지도 모른다.
털을 향한 거부감과 제모를 향한 열정은 인간 자신도 매끄러운 존재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증거일 수 있다. 마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실제 인간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냄새도 없고 털도 없으며 털이 그려져 있다 해도, 그것을 직접 느낄 수는 없다. 그래서 수염을 기른 남성과 함께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진이나 영상 속에 등장하는 이미지로서만 마주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일반화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겠지만, 무모無毛함을 추구하는 우리들은 지금 자연으로서의 인간을 극한으로 거부하는 지점에 다다랐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외치던 조선시대 사고방식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이 자연적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고 지내야 할 이유를 더 이상 찾지 못하는 듯하다. 털을 자르고 깎고, 급기야 뽑아버리기 시작한 요즘. 인간은 인간 자신의 문화 속에서 완전히 자연을 멀리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