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사회의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부자유와 불평등의 기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가 떠오른다. ‘조상 대대로 대지주인 사람’과 ‘소작농의 삶을 살았던 사람’, ‘근대화 과정에서 대자본가로 성장한 사람’과 ‘임금노동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을 결정한 요인은 과연 무엇인가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순간에는 물리적인 ‘힘’만이 존재했으리라는 서글픈 생각을 한다. 땅을 차지하고 대물림하고, 빼앗아 소유하고 그것을 지키고 이후에는 ‘법’을 만들어 함부로 뺏고 빼앗을 수 없게 만드는 과정에까지 ‘힘’이 크게 작용했으리라는 점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육체적인 힘으로 차지하고 지킬 수 있었던 재산이었지만, 그 양이 점점 늘어나거나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이 증가함에 따라 법이 필요했으리라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굳이 루소(인간 불평등 기원론)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상상할 수 있다.
이때 인간의 본성은 공격적인가 아니면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한 공감을 바탕에 두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은 본래 공격적이었기 때문에 욕심을 부리고 타인을 공격하며, 빼앗으려고 했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폭력적인 성향 때문에 국가가 필요했다는 이론(홉스)은 제법 설득력이 있다. 반면 인간의 본성은 ‘공감’과 ‘연대’라고 본다면 어떤가. 누군가의 능력이나 재산을 빼앗기보다는 그의 능력에 공감하여 연대한다. 이 연대를 바탕으로 그에 반하는 세력에 적대적일 수 있었던 것인지를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국 폭력성을 지닐 수밖에 없고, 이 폭력성은 타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결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타자는 자의식으로 내면화될 때에만 받아들일 수 있는 철저한 외부로 존재한다.
사실상 최근의 ‘백신 패스’ 논란은 근대적 차원의 인권이나 자유의 개념을 넘어선다.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 자체에서 이분법이 얼마나 쉽게 또는 교묘하게 적용되었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아니었을까 싶다.
방역, 즉 내부를 지키기 위해 외부를 차단하는 방식은 이미 인류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 깊이 녹아들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백신은 ‘성별, 종교, 학력, 지역, 부의 정도’와 같은 이름으로 존재했고, 많은 사람이 백신 패스를 적용받기 위해서 노력했다. 더 좋은 직장을 가지고, 더 많은 돈을 갖기 위해 투자하는 모습은 우리 사회가 인정하는 ‘패스’를 갖기 위한 ‘피·땀·눈물’인 셈이다. 물론, ‘성별’은 태어남과 동시에 결정되었기에 수천 년 역사 동안 여성을 ‘패스’ 받지 못하는 존재로 낙인찍어 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 안타깝지만 ‘백신 패스’를 완전히 폐지한 상태로 사회를 유지할 수 있을지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어떠한 구분도 없이, 차등 없이 누리는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쉽게 상상할 수 없다. 만약 그러한 자유가 존재한다면 우리가 전혀 모르는 세상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의 ‘자연 상태’조차도 도대체 왜 그럴까라는 의문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경험하는 우연한 사건이 사실은 과거의 업보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해야만 하거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그 종교적인 구원의 순간에도 도대체 업보와 심판의 경계는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지를 묻게 될 것이 뻔하다. 그렇다. 우리는 정말이지 생각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 어떤 상태나 상황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이고,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무런 ‘패스’ 없이 그냥 통과하고 싶다. 학력과 경력이 동일한 사람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서 차등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국가의 지침에 따르는 사람과 따르지 않는 사람을 겉으로는 존중하는 척하면서 은근한 불편을 조장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물론, 나는 원하지 않았음에도 남성으로 태어났고 국가의 지침에 잘 따르는 까까머리(‘까’라면 ‘까’지 ‘머’ 그‘리’ 말이 많아)지만, 네 선택이 ‘옳다’고 평가받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다. 패스를 얻고 싶은 것도, 패스를 얻고 싶지 않은 것도 모두 자유이기 때문에,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 스스로 느끼고 감내하는 것이지 누군가가 지어준 ‘책임’을 겪어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