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無模]한 세상을 꿈꾸다
공정함을 이야기할 때, 기회의 공정성과 과정의 공정성을 이야기한다. 결과의 공정성은 기회와 과정의 공정성에 좌우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동일한 기회와 과정을 얻었다면, 결과를 얻을 가능성도 그만큼 공정했으리라는 생각일 듯싶다.
우리가 살면서 얻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사회와 문화 속에서 얻는 기회가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남 자체가 기회일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 태어날 때 나고 자랄 환경을 선택할 수 없으므로 결국 그것은 기회라기보다 그저 내던져짐(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이라고 봐야 할 듯하다.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에서 공정하다는 느낌을 맛보지 못한 우리에게 '진학과 취업', '승진과 부(富)의 획득'에서 소외되지 않겠다는 욕망은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런 욕망은 쉽게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실력자들과 내가 지지하는 정치세력을 향한 기대를 키우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는 존재이다. 믿음은 곧지 않고, 신념도 버리기 쉽다. 밖으로는 공정함을 주장하면서 안으로는 공정하지 못함을 용인할 수 있다는 마음도 가진다. 이는 이현재의 논리를 빌리면, 많은 사람이 주장하는 공정성에 동의하지만 그것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까지 동의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인정"일 수도 있다(이현재, 『여성혐오 그 후, 우리가 만난 비체들』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은 1+1=2라는 명확하고 단순한 공식으로 살아갈 수 없다. 정해진대로 하면 된다고 말하지만, 그 정해진대로의 기준은 도대체 누가 정한 것이냐는 물음이 언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던 루카치의 낭만적인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누스바움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숫자의 합리성에 가린 채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문제들이 산재하고, 이를 상상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꼭 해결책을 마련해 주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고, 호소에 공감하고, 투정을 들어주고, 나의 정곡을 찔렸을 때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정도면 충분할 수도 있다.
조히드존의 말처럼, 사회의 변화는 개인에게서 온다(『아시아 인 울산』에서). 타인의 사사로운 감정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어쩔 수 없다거나 그건 규칙에 어긋난다는 단호한 말 대신, 숨통을 트일 수 있는 한 마디를 해줄 수 있을 때, 그런 개인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는 정해진대로의 공정함에서 벗어나, 다소 혼란스러워 보이는 자유분방함 속에 공정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