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선생 Oct 09. 2021

無慕한 우리: 멍하니 앉아 뭐하니?

자가용 자동차를 가진 주제에 자가용 자동차가 넘치는 시대를 생각하다

멍하게 앉은 사람을 보면 아무 생각 없다고 판단하고는 한다. 그렇지만, 멍하니 앉은 시간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다. 내면을 보살피거나, 추억에 잠기거나, 미래를 계획하는 일들이 멍하니 앉은 그 시간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내면을 보살피거나, 추억에 잠기거나, 미래를 계획하는 일들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일이 삶을 사랑하는 일과 같다고 생각하는 요즘이기에, 멍하게 앉아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은 불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내면을 보살피는 일, 추억에 잠기는 일, 미래를 계획하는 일이 포함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 한 인간은 시간(역사)으로 구성되기 때문이고, 그 시간은 과거와 미래를 포함하기 때문이겠다. 특히, 과거가 갖는 의미는 절대적이고도 아름답다.


자율주행을 향한 꿈은 운전대와 방향지시등, 가속·브레이크 패들에서 신경을 끊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된 듯싶다. 게으르고 싶은 욕망.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서 바깥을 바라보고 싶다는 욕망 말이다.

지코의 첫 정규앨범 콘셉트 사진(사진=KOZ엔터테인먼트, http://mksports.co.kr/view/2019/908441/에서 재인용)

멍하게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욕망은 ‘유리창’이라는 독특한 물건의 등장으로 가능했다. 투명하지만 안과 밖을 구분해주는 단단한 벽. 그 벽을 통해 안전하게 머무르면서 바깥을 바라볼 수 있다는 그 느낌은 ‘관음증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있기 전에도 달리는 물체에 앉아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멍하니 바라볼 수 있는 경우가 있었다. 멀리는 가마꾼이나 마부에 의지해 여행을 다니던 중세 시대를 떠올릴 수 있다. 가깝게는 버스 차창을 바라보며 이어폰으로 음악소리를 흘려 넣던 학생 시절을 떠올릴 수 있다.


자동차를 마련하기 전까지 우리는 모든 신경을 끊고 그저 멍하니 바깥을 바라볼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었다. 물론, 급정거와 급발진을 일삼는 일부 운전기사 아저씨들 덕분에 앞좌석에 부딪히는 경우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좌석에 몸을 맡긴 채 편안히 어딘가를 향할 수 있는 자유, 설령 흔들리는 손잡이를 잡고 있더라도 그 흔들거림에 몸을 내맡긴 채 멍하니 있을 수 있는 허허실실의 경지까지도 맛보고는 했다.

영화 <동감> 포스터

출근길과 퇴근길에 자동차가 가득하다. ‘오늘 하루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오늘은 정말 힘들었다. 집에 가서 뭐하지?’라는 걱정만으로 멍하니 앉을 자유는 사라졌다. 그저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른 차량을 앞지르려고 한다. 정지선에서 신호를 받으며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상황도, 잠깐 화장을 고칠 시간도, 음악을 고르거나 라디오 주파수를 새로 맞출 시간도 없다. 우리가 꿈꾸던 자율주행, 혹은 반-자율주행 시스템은 그런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전방 차량이 출발하였습니다.


경고음이 울린다. 그 소리가 이렇게 들리는 듯하다.


멍하니 앉아 뭐하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