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선생 Nov 25. 2017

너의 몸에서 먼 우주의 별을 만진다

채호기의 <손가락이 뜨겁다>

1

에로티시즘의 본질은 상대방을 통해 내 존재의 초월을 경험하는 것이다. 나와 너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경험은 개체의 죽음을 경험하게 하고, 그 죽음 너머에 있는 신비한 낙원을 경험하게 한다. 물론 이렇게 이상적인 에로티시즘이 가능한 시절은 이미 지나간 지 오래 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누군가를 보고 에로틱한 감정을 느낄 때, 나를 완전히 잃어도 좋다는 결심보다는, 너를 그저 갖고 싶다는 욕심이 더 강하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나의 동일성이 와해되는 경험을 통해, 영원히 멀기만 한 너의 존재에 가 닿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동일성 너머에 존재하는 진정한 나와 너의 완전한 결합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너무 말이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쉽게 말하면 내가 나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행동과 말투와 생각과 믿음이 누군가와의 사랑을 통해서 무너지는 경험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랑은 생물학적으로도 뇌과학적으로도 매우 짧게 지속될 뿐이기 때문에,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이라도 나를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언젠가 정신줄을 다잡고 본래의 나를 되찾게 될 때에는, 결코 너를 위해 나를 버릴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2

하늘의 별은 뜨겁다. 밤은 차갑다. 벌거벗은 네 등은 차갑다. 내 손을 뜨겁다. 비가 오고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뿌연 수증기. 내 손가락들이 수증기에 갇힌다. 물렁물렁해진 진흙에 발이 빠지듯 네 등을 산책하는 손가락들이 빠져든다. 네 등에 손톱 끝으로 고랑을 내며 글씨를 쓴다. 씨앗을 뿌린다.

흙이 글자를 끌어당긴다. 네 등에 묻힌 글자에서 싹이 돋고, 들꽃들이 피어났다. 밤은 뜨겁다. 꽃은 뜨겁다. 꽃의 향기는 시가 되어 손가락 끝에 만져진다. 네 등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영원히 새겨졌다. 별은 뜨겁다. 손가락도 뜨겁다. 

-채호기, <손가락이 뜨겁다>


채호기 시인의 시다. 이처럼 에로티시즘을 아름다운 언어로 담아내는 시가 있을까 싶다. 1연은 애무의 시작을, 2연은 애무의 절정을 보여준다. 읽어 보면, 시간은 어느 조용한 밤이겠다. 깊은 밤 어두운 하늘에 저 멀리 밝게 빛나는 별을 만지려고 하듯이, 나는 떨리는 손으로 이제 막 애무를 시작하려 한다. 나의 손가락은 빗줄기가 되어 차가운 밤공기에 식어버린 너의 등에 닿는다. 나의 뜨거운 손가락과 너의 차가운 등이 닿는 순간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비를 맞은 대지가 부드러운 진흙으로 변하듯, 차갑게 경직되었던 너의 등도 부드러운 흙이 되어 허물어진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너의 등에 고랑을 파고 씨앗을 뿌린다. 얼마나 간지러운 사랑의 언어였을까. 비를 충분히 머금은 땅처럼, 너의 등은 나의 손가락이 뿌려 놓은 씨앗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그 꽃의 향기는 아름다운 시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보이지 않는 무엇이고, 영원한 것이다. 그러나 만져진다. 그렇다. 그토록 만지고 싶었던, 아득히 멀리서 빛나던 밤하늘의 별이다. 나의 손가락과 너의 등이 맞닿은 그곳에서, 별은 뜨겁다. 이 공간은 감히 우주가 된다.


채호기 시인은 시의 제목을 <손가락이 뜨겁다>로 지었다. 뜨거운 것은 그들의 몸도 아니고, 둘이 있는 공간도 아니다. 그저 손가락뿐이다. 시인은 연인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애무의 순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그토록 만지고 싶어 하던 멀기만 한 별을, 영원한 타자인 너의 등에서 만지게 되는 순간을 그려내었을 뿐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적나라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시인의 능력일 것 같다. 


3

우리는 사랑하는(사랑한다고 주장하는)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그 사람을 알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모르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래서 영원히 타자다. 결코 나의 동일성으로 포섭할 수 없는 영원한 외부, 불온한 존재. 그 사람은 광활한 우주고, 이 우주를 나는 영원히 떠다닐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라는 우주를 벗어날 수 없다. 우주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를 나는 결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너라는 우주를 벗어나서 살 수 없다. 나는 오늘도 너라는 우주에 떠 있는 어떤 별을 향해 손가락을 내민다. 그 별을 만질 수 있을까. 만지지 못할까. 


그게 무슨 상관이겠나. 나는 이미 당신의 우주에 있는 것을. 

작가의 이전글 수신확인을 한 사람은 나 혹은 당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