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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Jan 11. 2018

나. 너. 그 '사이'

이문재의 <사막>

MBC 애브리원에서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친구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체험하고 돌아가는 방송을 한다. 최근에 한 프랑스인의 친구들이 방문하여 한국을 즐기다가 돌아갔는데, 마지막에 한국의 인상을 묻는 말에 한 친구가 대답한 내용이 인상 깊었다. 그 내용을 정확하게 옮기지는 못하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한국인들은 굉장히 냉정하고 차갑고, 남들과 잘 어울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는 대답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는데, 다만 아주 정중했을 뿐이라고도 말했다.


이러한 장면을 보던 패널들에게 자신의 친구들을 초대한 프랑스인이 했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인들 중에 워커홀릭이 많다는 사실로 인해서 흔히 갖는 선입견이라는 것이다. 예전에는 한국 하면 '정(情)'이었는데, 이제 한국은 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정한 워커홀릭의 나라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물론 해당 방송에서 외국인들이 머문 곳은 서울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인상이 대한민국 최첨단 도시인 수도 서울에만 한정될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대한민국 사람들이 소위 '한국인의 정'을 예전에 비해서 충분히 발산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물론 그놈의 정 때문에 여러 문제들(심지어 정치적인 폐단)까지 발생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한국인의 정은 경계해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일까? 사라져 가는 한국인의 정에 대한 아쉬움을 이문재 시인의 시 한 편에서 느끼게 되는 것은.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 이문재, <사막>


아주 작은 모래알을 제대로 셈하는 것조차도 힘들 텐데, 이문재 시인은 <사막>에서 모래와 모래 사이를 헤아린다. 시인은 모래가 많은 것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고, 바로 그 때문에 모래가 사막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심지어 그것은 아주' 오래된 일'이라는 것까지 담담하게 일깨워준다. 그는 도대체 사막에서, 모래와 모래 사이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이문재 시인의 생각을 아주 조금이나마 공감해 보기 위해서는 앞에서 이야기한 프랑스인 친구들의 한국 감상평에 주목해 봄직하다. 한국 혹은 서울은 사막이다. 어쩌면 그럴듯한 오아시스의 신기루도 갖추었는지 모른다. 이방인의 시선이 이미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이 사막에서 모래알처럼 모여 있는 우리들은 저마다의 성공을 꿈꾸며 자신의 일에만 열중하고 있다. 그렇게 일을 하면 언젠가 시원하고 아름다운 오아시스에 다다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말이다. 어쩌면 오아시스는 한정되어 있고,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몇 안 된다는 현실적인 조건 때문에 우리는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게 누군가를 곁에 두고 함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이지 우리는 요즘 '사이'에 대해서 굉장히 불편하게 생각한다. 그 '사이'에서 온갖 오해가 발생하고, 그러한 오해로 인해 다툼이 생기기 때문이다. 흔히 이웃 사이에 층간소음, 내 차와 당신 차 사이에 '문콕', 우리 아이와 당신 아이의 다툼이 불편하고, 더 나아가서는 중년과 청년 사이, 어른과 청소년 사이, 여자(여성)와 남자(남성) 사이, 국가와 국민 사이가 불편하다. 심지어 그 사이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나와 너 '사이'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아예 멀어져서 사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리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이'를 좋아한다. 그래서 '사이'를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나 혼자 살겠다고 말하면서, 나만의 삶을 즐기겠다고 말하면서(YOLO),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일 뿐(비혼)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항상 '누군가'를 찾고 기다린다. 나와 취미가 같은 사람을 찾고, 결혼을 하지 않지만 함께 살 사람을 찾는다. 사물 혹은 동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아주 가깝게 밀착하여 숨쉬기조차 힘든 거리의 소멸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밀착을 꿈꾸며 바짝 다가서지만,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어진다. 우리는 내가 적당히 초점을 맞추어 너를 응시할 수 있는 사이, 내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을 때 너의 손이 다가올 시간을 적당히 벌어 줄 사이, 너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할 수 있는 사이, 내가 폭소를 터뜨려도 네 얼굴에 침이 튀지 않을 정도의 사이, 아주 편안한 호흡으로 가볍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이. 그렇게 우리는 나와 너의 '사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이문재 시인이 사막의 모래를 두고 한 말처럼, 우리가 사이를 좋아하는 일도 아주 오랜 일이다. 사이를 좋아했기 때문에, 인간은 모여서 살 수 있었다. 지금도 우리는 이 사막과 같은 도시에서 서로의 사이를 그리워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너무 멀어도, 너무 가까워도 안 되는 정말 황금비율의 거리 인지도 모른다. 사실 적당한 사이를 찾는 일이 무엇이 중요할까. 사막의 수많은 모래들이 그 보다 더 많은 사이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우리도 내 곁에 누군가를 앉힐 수 있는 용기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 부모의 부모의 부모의 부모… 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그 용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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