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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정의의 여신이 눈가리개를 벗을 때

by 정선생

정의의 여신에 관한 일반적인 이해는 저울, 칼, 그리고 눈가리개로 이루어진다. 선악을 저울질하여 징벌할 때, 눈을 가려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의지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이해와 달리 정의의 여신이 모두 눈을 가린 건 아니라고 한다. 눈을 가리지 않은 정의의 여신도 많이 있단다(https://50plus.or.kr/detail.do?id=3397818). 나는 안도했다. 눈을 가린 채 저울질을 할 수 없고, 그녀가 내리칠 칼날의 방향을 가늠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의는 법으로 이룰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법률 자체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법을 적용하는 주체가 눈을 부릅뜨고 판결을 기다리는 그를 살펴야 한다. 그의 표정과 행동, 그의 눈빛과 입꼬리를 살펴야 한다. 그의 사정에 귀 기울여야 한다. 법률에 그의 행동이 어긋났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가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느냐 아니면 하지 않을 수도 있었느냐를 살펴야 한다. 그가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혹은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가 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일을 굳이 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도 꼼꼼히 살펴야 한다. 그것이 저울을 한 손에 든 이유일 것이다.


눈을 가린 채 법을 적용한다는 건, 어쩌면 그 사람과 법의 관계를 헤아리지 않고 무조건 법 대로 처벌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런 법이 보호할 대상은 그 법을 고안하고 만들어낸 주체들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잘 안다. 언제 어떻게인지 모르게 재산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 법을 만들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합의했다고 하더라도, 책상에 앉아 법 조항 따위를 논의할 수 있었던 자들은 적어도 먹고 살 걱정이 없었던 자들이겠다. 혹은 잃을 것이 많았던 자들이었겠다.


삶의 무게에 질식할 것만 같은 대부분의 사람은 재산과 권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눈 가린 채 휘두르는 칼날 앞에 몸을 사려야 한다. 저울은 분명히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도 말이다.


정의의 여신이 눈가리개를 벗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똑바로 노려봐야 할 것 같다. 죄인이라고 불려 온 사람보다 오히려, 저울을 법전을 그리고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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