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설임에 담긴 윤리적 의미
소설가 정정화의 <쌀바위>를 읽고
소설가 정정화의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종종(혹은 많은 순간) 갈림길에 서 있다. 여행객의 지갑을 훔친 가이드, 타국에서 온 새엄마를 폭행하는 아빠를 목격하고서도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그것은 주인공의 성별이나 성격과 무관하게 윤리적 모순에서 기인하는 듯 보인다. 칸트의 정언명령을 따르는 것이 우리 세상의 윤리적 지침인 듯하지만, 실제 삶에서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울산도서관에 비치된 『글길』2022, 여름 17호에 실린 정정화 소설가의 <쌀바위>
「쌀바위」에서 ‘나영’은 ‘기석’의 등쌀과 참견, 지적질에 지쳐간다. ‘기석’은 누구보다 ‘사장’의 눈치를 보며, 가게에서 가장 성실한 직원으로 각인되려 한다. 그러나 ‘사장’이 자리를 비웠을 때 ‘기석’이 보인 행동은 손님이 지불한 현금의 일부를 자기 주머니로 가로채는 것이었다. ‘사장’의 믿음을 얻고, 그 믿음의 뒤편에서 도둑질하는 셈이었다. 이 상황에서 ‘나영’은 갈림길에 선다. ‘기석’의 행동이 ‘법적으로’ 나쁘다는 사실을 알지만, 청년 ‘기석’이 꿈꾸는 ‘빠른 성공(“돈을 빨리 벌어서 집 사는 게 목표”)’을 준법정신과 윤리적 양심으로 이룰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영’은 자신의 삶을 ‘기석’의 삶과 겹쳐 보았을지도 모른다.
‘나영’의 이런 고민은 이 시대 청년의 고민과 일치한다. 대학을 나왔지만, 전공 관련한 직장은 구할 수도 없는 현실. 그렇다고 변변한 일자리를 찾기도 힘들고, 설령 찾았다 하더라도 치열한 경쟁에서 자괴감을 느껴야 하는 현실에 처한 이 시대 청년의 고민 말이다.
‘나영’은 이런 갈등은 ‘쌀바위 전설’(울산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에 있는 가지산 정상 부근에 쌀바위에 얽힌 전설)을 떠올리는 것으로 해소된다. ‘해소된다’라고 말한 이유는 그것이 ‘기석’의 결말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었고, ‘나영’은 마을 사람들의 욕심으로 ‘쌀바위’가 쌀 대신 물만 흐르게 되었듯이, 자신이 나서지 않더라도 ‘기석’은 곧, 자신의 쌀바위(사장의 금고)를 잃을 것이 분명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나영은 기석의 일을 사장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나영’은 그 누구보다 사려 깊은 윤리적 주체였는지도 모른다. 누가 만들어 두었는지 알 수 없는 윤리(도덕)와 법. 그것이 요구하는 윤리적·법적 주체에서 실존하는 개인(개성)은 철저히 삭제되어 있다. ‘나영’은 그런 익명의 윤리 주체가 아닌 구체적 실존으로서 ‘기석’을 이해했으리라. ‘나영’의 망설임은 그런 세심함에서 비롯했을 듯싶다. 그렇다고 해서 ‘나영’이 망설임의 주체인 것만은 아니다. 해고된 이후 ‘기석’이 보내온 무례한 연락을 단호하게 끊어내는 ‘나영’에게서 망설임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다. “일방적인 마음은 사랑이 아닐 것”이라는 ‘나영’의 판단은 다양한 상황을 헤아리는 윤리적 주체로서 ‘나영’과 맞닿아 있다. ‘윤리’는 ‘사랑’을 바탕에 두고, ‘사랑’은 ‘관계 맺음’에서 시작해야 한다. ‘관계 맺음’은 서로에게 ‘상처’를 허용하는 것이라고 볼 때, ‘기석’은 한 번도 ‘나영’에게 상처받은 적이 없다.
소설가의 성별을 나누는 것은 매우 잘못된 비평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소설가가 보이는 행위의 특성을 ‘언어로 구체화’하는 데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언어의 폭력성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나는 소설가 정정화의 작품 세계가 ‘여성주의 윤리’를 딛고 있다고 느낀다. 짧은 문장으로 담담히 서술해 나가는 정정화의 문체에는 그러나 각 개인의 삶을 세심히 헤아리는 시선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