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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Nov 04. 2022

균형 잡힌 삶이란 무엇일까?

‘워라벨’은 어디에 있나?

  ‘조용한 사직’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다. 가만 보니, 회사에 자신을 갈아 넣지 않겠다는 의지가 요점인 것 같았다. 주는 만큼, 받는 만큼을 실천하는 완벽한 교환원칙에 따라 살아가겠다는 욕구가 반영된 듯도 했다. 이에 맞선 ‘조용한 해고’가 있다고 한다. 상대방이 조용한 사직을 추구한다면, 고용주도 그 사람을 조용히 해고하는 절차를 밟는다는 말이다. 이 역시, 받은 만큼 일하겠다는 선언에 일한 만큼 주겠다는 선언으로 맞서는 꼴이다. 연봉을 동결하거나, 주요 업무에서 배제하는 식이라는데, 멱살을 잡고 서로 먼저 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2019년, ‘워라벨’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을 때, 이상적이지만 실천하기 힘든 단어라고 느꼈다. ‘워라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경제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결국, ‘일과 생활의 불균형’이 전제되어야 할 듯하기 때문이다. 노동을 하지 않고 이익을 얻으려는 노력이 ‘영끌투자’로 이어지는 건 아닌가 싶다(물론, 그들이 기울인 노력이 있겠지만, 그것은 자신이 일한 것을 훨씬 초과하는 수익을 창출하기 위함이기에 정당한 노동의 대가라고 말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시간과 건강마저 포기하던 시대는 저물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갈아 넣으며,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으니 말이다.     


  문화도 유행이다. 유행에 뒤처지면 안 될 것처럼 느껴진다. 인터넷을 비롯한 모든 매체에서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사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일은 당당하게 주장하고, 보상받지 못할 업무는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이야기들은 솔직히 몇몇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복제되어 전파되는 것에 불과하다. 텔레비전에 나와서 워라벨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실제 그 누구보다 워라벨을 지키지 못하고 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영상에서는 그들의 노력과 성취는 보이지만, 스트레스가 보이지 않는다. 24시간을 1시간 혹은 그보다 더 짧은 영상에서 얼마나 솔직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워라벨’을 지켜주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워라벨’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 그저 일을 적게 하도록 도와주면 되는가, 그저 최저 시급만 올려주면 되는가. 적어도 나는 ‘워라벨’을 정량적으로 규정하기란 힘들어 보인다. 최저임금을 높이고, 근로시간을 단축하는 일은 얼핏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가져다줄 것으로 보였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벌 수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임금부담을 핑계로 삼아 고용을 축소하고, 근로시간을 단축하면 그 핑계로 임금을 줄인다. 혹은 적게 일하지만, 기업의 목표는 달성해야 하기에 시간 대비 과도(과다)한 업무를 요구할 수도 있다.   


  만약, 종일 일만 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워라벨을 유지하고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돌아오는 답은 무엇일까? “아니다.”일까? 그는 워라벨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고, 나는 균형 잡힌 삶을 산다고 말할 수도 있다. 종일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까지 자기 계발에 힘쓰고, 고작 3시간밖에 안 자는데도 나는 만족스러운 삶을 산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정시출근 정시퇴근을 하고, 여가를 즐기며 누구보다 자유롭고 편하게 사는 듯 보이지만, 삶이 고단하고 불만족스럽다고 말할 수도 있다.


  예컨대, 누군가는 가족과 함께 있는 것보다 하루 종일 일하는 것이 자신만의 ‘워라벨’일 수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일을 전혀 하고 싶지 않고 오직 집안을 돌보는 일이 최고로 ‘균형 잡힌 삶’일 수 있다. 어쩌면 누군가는 몇 달간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몇 달간 여행을 떠나고, 다시 몇 달간 일하는 반복이 조화로운 삶일 수도 있다.


  ‘워라벨’은 결국, 구체적으로 주어지는 조건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성(가치관)과 연결되어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돈 한 푼 없이도 행복한 사람, 상사에게 달달 볶이면서도 행복해하는 사람은 결코 이상(異常/異狀)한 사람이 아니다. 그건 그저 그 사람의 이상(理想)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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