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향한 도전을 주저하는 젊은 당신에게
‘안정적인 수입’은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요건이다. 결혼이 내 삶을 안정적으로 만들어줄 배우자를 고르는 일이라고 할 때(그래서 자신의 삶이 충분히 안정되어 있다면, 결혼은 필요하지 않다), 그 ‘안정’이란 ‘물심양면’이겠지만, 물적 측면이 가장 중요한 것을 부정하기 힘들다.
도시(특히 대도시)의 삶은 그 공간을 점유하면서 살아갈 권리를 돈으로 구매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생계(생명)를 유지할 수 없으므로, 지출을 감당하고도 남을 수입이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안정적인 수입을 위해 노력하지만, 많든 적든 안정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으로 삶 자체가 안정되기를 기다리는 일은 무의미(허무, 무모)하게만 보인다. 수억, 수십억 하는 아파트를 구입하고도 남을 수입을 얻기란 불가능하고, 수천만 원짜리 자동차를 할부 없이 구입하고도 남을 수입을 얻기도 힘들기 마찬가지다.
사업을 구상하거나 투자를 결정할 때, 자신의 삶이 흔들리지 않는 선을 찾아야 한다. 물건을 구매할 때 ‘가성비’, ‘가심비’를 따지는 것도 그 물건이 당장 일주일, 한 달의 삶을 흔들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겠다. 모두 돈과 관련된 안정이며, 우리 삶에서 돈이 지니는 의미가 그만큼 상당하다는 방증일 것이다. 지출할 일이 많아졌음에도 수입은 늘지 않거나 부족해지는 상황에서 돈의 소중함은 더욱 커지기만 한다.
좋아하는 일, 꿈을 향한 도전을 ‘준비된 이후’로 미루는 경우가 많다. 남녀 불문하고 그렇겠지만, 사실상 여성에게 그런 결정을 강요하는 경우가 더 많았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먼 과거나 현재나 마찬가지다. 영화 <하트 로커>에는 무모하게 폭탄을 제거하는 군인이 나온다. 그가 여기에 온 이유는 폭탄 해체가 자신의 심장을 뜨겁게 만들기 때문이다. 전장으로 오기 전, 그가 어린 아들에게 하는 말은 이런 내용이다. ‘나이가 들면 어릴 적 좋아했던 것들이 더 이상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좋아하는 것이 적어진다. 많아야 봐야 한두 개가 남는다. 내 경우에는 하나뿐이란다.’ 그게 바로 폭탄 해체였던 거다. 문제는 이 영화가 남성과 여성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성은 안정적인 삶에 무관심하고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지만, 여성은 안정적인 삶을 위해 남성의 꿈을 모르는 척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으로 이 영화의 ‘성 인지 감수성’을 헤아릴 수 있다. 뉴스를 보며 폭탄 테러로 인한 무고한 희생과 폭탄 해체 전문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당근을 썰어 달라고 부탁한다.
제아무리 안정적인 삶을 비하하려고 해도, 도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안정이 필요하다. 아기가 걸음마를 떼기 위해서는 엄마가 자신을 보호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아기가 잠들기 위해서는 엄마의 따뜻한 품이 있어야 하고, 언젠가 혼자 자기 위해서는 엄마가 조금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반드시 자신을 보호해 줄 것임을 믿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안정이 도전의 필요조건임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삶의 지속이라는 측면에서는 ‘꿈을 향한 도전’이 오히려 무모하고 위험해 보인다. 그럼 반대로, 삶의 지속을 부정하면, 그러니까 현재를 강조하면 비로소 꿈을 향한 강력한 도전 의지가 생기는 듯하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지금-여기, 현재를 강조하면서 ‘하고 싶은 일’, ‘이루고 싶은 꿈’에 과감히 뛰어들라는 말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삶은 생각보다 끈질겨서 결코 쉽게 무너지거나 중단되지 않으니까 말이다. 오히려 무너지길 바라는 순간들이 불연속적으로 놓이면서도 삶은 죽음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역설인가. 불연속적인 순간들이 모여 죽음을 향해 이어진다는 것이.
슬픈 말이지만, 준비된 상황은 결코, 오지 않는다. 준비는 순간순간 있을 뿐이다. 오랜 준비는 도전을 향한 의지를 꺾기에 충분하다. 사실적으로 본다면, 정치 상황 경제 상황의 변동에 따라 ‘준비된 상황’을 판단하는 기준이 달라진다. 준비하면 할수록 미흡해진다. 사실적인 부분을 제거하고 보더라도, 인간이 말하는 만족이란 애초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아닌가. 심호흡을 수도 없이 하면서 뛸 준비를 해도 결코 뛰어내릴 수 없다. 뛰어내리기 위해서는 그저 뛰어내려야만 한다.
그러나, 오늘만 살 것처럼 꿈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갈 필요는 없다. 마라톤을 하듯이, 낙숫물로 구멍을 뚫듯이 아니, 차라리 숨을 쉬듯이 천천히 꿈을 향하면 된다. 그걸로 족하다. 꿈을 꾸기 위해서 전력 질주하느라, 내 삶의 모든 것을 내팽개칠 필요는 없으니까.
세상은 100세 시대라는 삶의 연속성을 보장한다고 지껄인다. 그러면서도 100세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준비를 위해서 우리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간다. 그런데 세상은 어쩐 일인지 그 어떤 것도 연속적일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100년간 지속될 자신의 삶을 위해서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연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역설적인 시대에 사는 듯하다.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는 쉽게 지치고, 우울해지고, 정체성 고민에 빠지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혁명할 수 없다면, 현명하게 적응하며 살아가야지, 어쩔 수 있겠는가. ‘삶’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돌덩이를 하나하나 놓을 수밖에. 육지에서 다리를 완성해 놓겠다는 (준비를 향한) 욕심을 버리고, 기꺼이 강에 뛰어들어 징검다리를 놓으며 나아갈 수밖에.
*이 글을 쓰는 나도 여전히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다. 기껏 놓은 돌멩이가 유실되기도 하고, 너무 작은 돌이라 놓자마자 물에 잠기기도 했다. 하릴없이 다시 돌아가 돌멩이를 주워와야 한다. 그렇게 지금도 징검다리를 놓고 있다. 건너가야 할 곳은 아직, 저 멀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