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는 본체[本體] 만체[萬體]
우리는 왜 꼬리뼈가 남았을까
고양이는 꼬리가 본체일 수도 있다는, 이 말을 듣고 꼬리가 잘린 수많은, 길고양이를 떠올린다.
본체를 잃고 길 위를 방황하는 그들. 보고 듣고 냄새 맡으며 먹고 숨 쉬고 소화하는 기관의 집합체가 실은,
본체가 아님을 깨닫는 순간의 충격. 만만찮다.
고양이의 균형은 꼬리에서 온단다. 뛰어내릴 때도, 감정을 드러내고 다스릴 때도 꼬리가 필요하단다.
그런데 숱하게 마주하는 게, 꼬리를 잃은 고양이들이라니.
수천 년 진화조차 허락지 않은 꼬리의 소멸을 안긴 건 누구일까. 차라리 영역 다툼에서 패배한 표식이라면,
그들의 생존 게임을 겸허히 받잡을 터이나, 그렇지 않다면?
장 자크 상뻬는 『인생은 단순한 균형의 문제』라고 했다.
한쪽을 포기해야 하는 거창한 답도 없이, 아슬아슬 넘어지지 않으며 타야 하는 자전거-인생.
꼬리가 없어진 인간에게, 균형 잡기란 더욱이 힘들었을 터.
본체를 잃은 그들의 인생에 균형은 존재할 수 있을까.
오늘 아침, 아들과 어린이집 차를 기다릴 때, 우리 앞을 지나간 그 고양이의 뭉툭한 꼬리가 떠오른다. 춥다.
그래도 봄이 다가오고 있다. 그 아슬아슬한 계절의 균열, 그리고 균형.
더하여,
유전은 거대한 현상일 뿐이겠고, 하필이면 그런 형태가 일어난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심지어, 애초에 꼬리가 뭉툭한 개체가 아니었는데도, 그런 꼬리를 가지고 태어난다면, 그건, 우리가 고양이를 기르다가 길에다가 버린, 혹은 잃어버린 후 잊어버린, 탓이 아닐까(품종이라는 단어는 상품성을 강조하기에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 충분한 영양과 사랑을 주리라 약속했던 집사들은 어디에 갔는가. 그들은 결국, 누군가의 집사가 되기보다, 자신의 집사가 필요했던 게 아닌가.
생명의 소중함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진다는 건, 그만큼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는, 씁쓸한 증거겠다.
*더하여가 붙어, 시답잖다에서 우리는 무모하다로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