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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Mar 30. 2023

모국어 화자 앞에 선 외국인

내가 마셨던 사케는 분명 간바레 오또짱인데?

  "간바레 오또짱"이라는 사케가 있다. 이십 대 후반, 대학원을 다니던 우중충한 1984년 1월, 2월, 3월 생 세 명이 모여서 즐겼던 술이다.

  일본 학생들에게 이 술 이름을 이야기했는데, 키득키득 웃었다. 유카인지 미쿠인지, 슈리인지 하츠키인지, 쿠사노인지 모르겠다. 리노랑 린카는 분명 아닌 것 같다. 아무튼 내가 말한 술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오또상'이 아닌 '오또짱'이라고 말한 게 우스웠던 모양이다.

  나는 짐짓 술 이름을 틀렸다고 생각했다. 일본 학생이 웃었기 때문에 분명 틀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또상?이라고 되물었고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수업 시간에도 일본 유학생 두 명이 있다. 이들은 복수 학위제도를 이용해 입학한 학생으로, 일본 대학에서 2년, 한국 대학에서 2년을 보내면 두 개의 학위를 받을 수 있다. 이 친구들에게도 상, 짱, 쿤과 같은 말들을 물어보면서 친해지려고 했다. 나는 앞서 겪었던 나의 '실수담'을 공유했다. "간바레 오또짱"이라는 사케가 있는데, 혹시 아느냐고 물었다.

  사케를 마신다고 했던 학생은 모른다고 했고, 정작 사케를 마셔보지 않았다고 한 학생 알 것 같다고 했다. 뒤에 언급한 학생은 구글에서 해당 사케를 검색해 보여주었고, 두 학생은 역시 가볍게 웃었다.


  이들의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던 나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제 수업 시간에 "간바레 오또짱"이라고 했더니, 친구들이 웃어서 "오또상"으로 고쳤다고 말이다.

  그러자 인터넷으로 상품을 찾았던 학생이 "사실 여기에 오또짱이라고 씌어 있어요"라고 말했다.


  "아, 그럼 제가 맞는 거예요? 아! 이런, 다음 시간에 말해야겠다. 내가 맞았네~!"


  일본어를 알지 못하는 내가 일본인의 웃음에 이미 잘 알고 있었던 일본어를 수정했다. 에게 그것이 외국어이기 때문에, 모국어 화자 앞에서 자기 검열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웃는 이유가, 나의 어설픈 발음 때문일 수도 있고, 잘못된 표현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엉터리 문법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외국인의 입에서 들려오는 모국어란 항상 '엉터리'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보이는 모든 행동(웃음, 지적, 교정, 칭찬 등)은 그들 스스로 검열하게 만들 수도 있고, 말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꺾어 버릴 수도 있다, 고 생각했다.  


  그러자 문득, 한국어를 배우러 온 그들이 나를 얼마나 믿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정확한 발음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큰 잘못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채찍질을 해 달라고 조르는 말에게는 채찍이 폭력이 아닐 수 있지만, 달리고 싶지 않다는 말에 가하는 채찍질은 폭력이다. 그들이 한국어를 매우 능숙하게 사용하면서 성취감을 얻고자 한다면, 나는 그들을 엄격하게 대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친구들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많은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아주 엄격한 잣대로 교육을 시도한다. 무엇이 틀렸고, 얼마나 완벽한지 완벽하지 않은지를 지적하고 교정하려고 시도한다. 그런 이유는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그들에게 완벽한 한국어라는 이상을 설정하고 다가가야만, 그들은 끊임없이 교육이 필요한 대상이 된다. 교육이 필요한 대상이 있어야, 교육 시장이 활기를 띠고, 교육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지 않을 수 있다. 결국, 나 자신을 위해서 그들을 지적하고 교정하고 평가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언어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전하고 싶을 때 가장 완벽하게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전하기 위해서는 그의 언어가 필요하니까. 그러나 그 이외의 언어는 모두 일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즐겁게 대화하며 지내고 싶다.


  그들에게 한국어가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문법 따위의 기능이 아니라, 1년 2년 3년 4년 저마다 머물렀던 만큼의 한국을 추억하는 훌륭한 매개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내 글에서 사랑은 이어령 선생의 "사랑하다=생각하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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