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about THINGs

사랑할수록 상처를 남긴다

by 정선생

정재승 박사가 어느 방송에서 가까운 사람에게 화를 더 쉽게 자주 내는 이유는, 친밀한 관계인 사람을 '자기'를 인식하는 영역에 저장하는 뇌의 특성 때문이라고 했다. 얼마 전에 썼듯이, 한 사람을 사랑했다고 말하는 여러 작품들이 이별 후의 상황을 다루는 이유도 이와 같겠구나 싶다. '자기와 동일하다고 생각하여 쉽게 화를 내고 상처를 줬던 그 사람이' 결국 떠나버리고서야 '아차, 그 사람을 너무 나처럼 쉽게 대해버렸구나, 정말 가깝게 생각했구나, 그게 사랑이었겠구나'를 추억하고 후회하는 게 아닌가 싶다.

다르게 말하면,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상처를 쉽게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일까? 상처를 많이 준 사람이 어쩌면 내가 사랑한 사람이었던 걸까? 그럼 물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내가 가장 사랑한 물건일수록 더 자주 나와 함께 할 수밖에 없고, 나의 신체 일부처럼 되어버려 쉽게 잊히고 쉽게 상처를 입는 게 아닐까?


https://youtu.be/6qSXKFscgcs

Oris Aquis Depth Gauge: Diving Reaches New Depths (2013)

한창 시계에 관심을 가지던 시기, 우연히 본 브랜드의 시계가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수염이 덥수룩한 나이 든, 그러나 강인해 보이는 남자. 그가 차고 있는 시계 역시 강인해 보였고, 내가 두려워하는 '물'이라는 대상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모습이 그려지니 더 매력적이었나 보다. 그냥 시계가 예뻤다고 말하는 게 솔직한 답변이다.

보일의 법칙을 활용해 수심을 표시하는 기능을 지닌 데다, 500미터(50기압) 방수 능력을 갖춘 저 시계는 거의 400만 원에 육박하였기에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 그러다가 2020년 9월에 저 제품과 동일한 제품군에 속한 일반 제품을 구입했다. 아내의 용단이 없었다면 손에 넣을 수 없었을 테다.


요즘 시계 시장은 고가 경쟁이 치열하다. 10만 원에서 30만 원이면 좋은 제품을 구매할 수 있었던 브랜드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100만 원에 가까운 제품을 내놓고 있다. 저렴한 가격에 이른바 '시계다운 시계'를 구하는 건 하늘에 별 따기이다. 가성비라는 말도 "300만 원 정도로 접근성이 좋다"라는 식으로 의미가 달라지고 있는 듯하다.

염가(시계에서 염가는 내 생각엔 50만 원 안인 것 같다) 제품은 중국 제품이 많다. 알리 익스프레스에서 판매하는 시계들은 대부분 스위스, 독일, 일본 시계를 '카피'한 제품이 많은데, 그나마 브랜드 로고까지 그대로 카피하던 것은 아니어서, 중국산=짝퉁이라는 불명예는 어느 정도 벗은 듯하다. '오마주(hommage)'라는 애매한 단어의 등장이 중국 시계 시장을 키우는 데 한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하는 소재를 볼 때, 확실히 전통적인 의미의 가성비는 중국 시계들이 챙겨가고 있는 듯 보인다(물론, 여전히 대충 만들었기에 2만 원에서 3만 원을 받고 파는구나 느끼는 경우도 많지만).

아무튼, 명품이나 자동차, 혹은 부동산이 그러하듯이, 아주 잘 모시고 있다가 좋은 가격에 팔아 자금을 마련하고, 또 다른 제품으로 옮겨가는 모습이 시계 소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유리나 브레이슬릿(금속팔찌)에 흠집이 남지 않도록 필름을 붙이거나, 애초에 세라믹, 사파이어 글라스와 같은 소재로 중무장한 제품을 사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를 두고, 어떤 사람은 시계를 진짜 사랑하는 일은 그저 아끼고 모시는 게 아니라, 어떤 순간에서든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에 동의한다. 물건을 아끼는 건 좋은데, 아낀다는 말 자체가 물건을 사용하지 않고 고이 모셔두는 걸 가리키지는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떤 물건을 사용하되, 부러 망가뜨리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주의사항을 최대한 지키려고 하되, 그에 얽매여서 물건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2년을 넘게 거의 매일 착용한 시계가 여기저기 흠집을 보인다. 시간 보는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특별해 보이지 않지만, 시계를 애호하는 사람은 시계를 완상(玩賞)함으로써 행복을 느끼기에 이런 흠집이 아주 잘, 크게 보인다. 물론, 이런 상처를 보면서 만족감을 느끼는 나 같은 사람도 있고 말이다.

아무튼 정말 열심히 사용했구나 사랑했구나를, 상처로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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