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츠 시계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시계를 '사랑'하는 사람은 보통 '기계식' 시계를 대상으로 삼는다. 번거로움은 신경 씀, 마음 씀을 가리킨다. 어떤 대상을 생각하며 마음을 쏟는 행위는 번거로움을 동반한다. 자동차 애호가 중에 내연기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전기자동차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존재해야 하고, 국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류가 생존해야 한다. 생존한 인간, 생존하기 위한 인간이 그들이 내놓은 상품을 소비할 것이다. 그 상품이 아니면 생존할 수 없다거나, 생존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그 제품을 소비하거나 말이다. 한 국가와 국제기구의 정책은 일개 기업의 생존이나 그들이 누릴 혜택과 연결된다. 국민을 위한 국가의 결정에 최선을 다해 협조하는 기업은, 국민(소비자)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내연기관 퇴출은 나로서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동'처럼 보인다. 이미 누군가가 지적한 바 있듯이, 화석연료든 전기든 인간은 '에너지' 사용을 지속할 것이기 때문이다(https://youtu.be/RZblnRfX59o).
'내연기관을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탄소'와 '전 세계 사람들이 이용하는 전기 자동차를 위한 전기를 생산하면서 발생하는 탄소'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 '모든 사람'이 '모든 시간', '모든 영역'에서 전기를 소비한다면, 그 전기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심각한 논의가 없는 듯하다(https://youtu.be/YQNP731Bi3o, https://youtu.be/USpEe71OWKI).
신재생 에너지의 중요성에 관한 수많은 뉴스가 나오고, 한국은 세계적인 에너지 정책 기조에 따르지 않는(심지어 역행하는) 듯하다는 전문가들의 비판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상황. 그러나 그런 기조는 과연 얼마나 옳고, 바람직한 것인가에 관해서는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약, 전기자동차를 타면서 나는 지구 환경을 지키고 있다고 자위한다면 그건 눈 가리고 아웅이다. 전술한 것처럼,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이 얼마나 청정한가를 알지 못한다면, 결코 자신이 이용하는 기기가 친환경적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심지어 대한민국의 전기는 내연기관차가 내뿜는 연기보다 깨끗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전기자동차라는 개념을 소비함으로써, 눈에 연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지구환경지킴이를 자처한다. 플라스틱 빨대를 없애고 종이 빨대를 제공하면서, 플라스틱 빨대 대신 입을 대고 마실 수 있는 플라스틱 뚜껑을 제공하면서 환경을 지키고 있노라 자부하는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자연을 향한 진지한 고민은 없고, 자위만 넘쳐나는 세상이다. 플라스틱 빨대 대신 종이 빨대와 뚜껑이 넘쳐난다.
챗 GPT를 이용하면서,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질문으로 보다 빠르게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구축한다고 하더라도, 5조 개의 데이터 중 어떤 것을 이용했는가를 제대로 알지 않는 한, 그 결과물의 가치는 떨어지고 만다. 5조는 언감생심, 5백 개, 5십 개, 15개 정도를 겨우 읽어 내놓은 논문이 가치 있는 이유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허점이 많다는 사실. 그 허점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향해 열려 있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수천 수백 년 동안 누려온 '생성'의 역사임을.
그리고 그러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이용하면서, 남기는 자신의 기록이 어떻게 이용될지도 아직은 알 수 없다.
이런 말을 쓰면 마치 내가 기술 혐오자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술은 죄가 없다. 그 기술을 활용하는 인간에게 오류가 많다는 사실이 문제다. 나는 기술을 창조하는 사람을 믿지 못할 뿐이다. 앞에서 말한 전기자동차와 챗 GPT 같은 인공지능 기술은 그 기술을 선점하고 독점하고 투자하는 개인이나 집단에게 이익을 줄 수 있겠으나,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기술을 창조한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경쟁 공간에서, 기술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더욱 치열하게 싸워 이겨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런 기술은 인간이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도록 돕는 기술이다. 인간만 멈추지 않으면 그만이다. 인간이. 그게 핵심이다. 그래서 나는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