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막 실수로 보이지만, 생각할 가치가 있는
“이 세상 최고의 수는 무수[無數]”라고 했다. 2014년 5월 3일에 방송한 <무한도전>에서 배우 김보성 씨가 한 말이었다. 노홍철은 이 말을 듣고 진짜 놀란 듯했다. 나도 이 말이 마음에 들었다. ‘수’를 생각하지 않고 두는 어린아이의 천진난만 바둑은 고수(高手)를 당황케 한다. 영화 <신의 한 수>에서 이와 같은 내용이 언급되었던 것 같다.
사실 게임에서 ‘수’를 따지는 일은 숫자(數)가 아니라 수단(手)을 따지는 일이다. 그래서 <무한도전>에서 보여준 자막은 ‘오타’로 보인다. 다만, 자막 실수는 편집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므로, 실제 촬영 현장에서 전달한 배우 김보성의 메시지는 ‘수를 노리지 않는 것이 최고의 수’라는 의미라고 보인다.
그런데 숫자를 세지 않는 것이 최고의 수라는 표현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뉴스에서 예비타당성 조사(예타성조사)를 신청했다거나, 예타성조사에서 떨어졌다거나, 조정해서 다시 신청하려고 한다는 내용을 요즘 자주 듣는다. 서울 수도권 지역은 잘 모르겠지만, 부산 울산 경남의 경우에는 좀처럼 사업을 신청하기가 쉽지 않다.
행정가들은 언제나 수(數)를 따진다. 그 수에는 인구, 수익, 경비 등이 포함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곳을 이용할 것인가, 얼마나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인가,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어갈 것인가를 꼼꼼하게 따져 국비를 지원하는 것이 예타성조사다.
국비는 곧 세금이니 함부로 쓰일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예타성조사는 중요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방을 위한 인프라 조성은 수(數)를 따지면 따질수록 이루어질 수 없음을 생각한다. 서울과 수도권은 이미 인프라가 충분히 갖추어져 청년들을 흡수한다. 흡수한 청년을 감당하기 위해서 서울 주변을 다시 개발한다. 이용객이 늘어났는데도 증차를 선택하는 대신 좌석을 떼어내고 더 탈 수 있다며 탑승을 부추기는 꼴이다.
지방을 개발해서 청년이 좁아터진 서울로 들어오지 않더라도 넉넉한 땅에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가격으로 집을 장만하고, 원하는 일자리를 갖고 가정을 꾸리며 살아갈 기회를 만들지 않는다. 전 국토가 서울의 반만큼이라도 개발된다면, 부동산 가격도 평균치를 만들어낼 것 같다(물론, 워낙 복잡한 사정이 있으나 여기에서는 단순화한다). 적은 용량이 배터리를 가진 전기자동차로도 충분히 생활이 가능할 것 같다. 꼭 서울과 부산을 왕복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질 필요가 줄어들 것 같다. 그리고 인구 집중에 따른 여러 문제도 해결할 실마리를 보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행정가들은 그것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예타성조사 결과에 관한 뉴스는 수에 얽매인 행정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이미 포화상태를 넘어선 지역을 새로 고치고, 빈틈을 만들어 채워 넣는 데 드는 노력과 비용을 지방에 투자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다. 여러 복잡한 이유를 내세우지만, 근본적인 그 이유는 현 상태를 유지할 때 얻는 이익이 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변화를 주면 포기해야 하는 수(數)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가진 것을 나누면서 참아야 하는 세월, 들여야 하는 비용, 포기해야 하는 기득권이 모두 포함된다. 자신이 일군 것을 나누기란 누구도 쉽지 않다.
역시, 수(數)를 세지 않는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한낱 예능에서 한 연예인이 말한 ‘최고의 수 무수’가 크게 와닿는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숫자 체계의 가장 큰 특징은 0의 존재이고, 옆으로 나란히 쓰는 방식으로 가장 큰 수를 얼마든지 쉽게 부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10,000,000이 가장 크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100,000,000만 보이면 된다. 심지어 10,000,001만 내어 보여도 가장 크다는 의미는 쉽게 부정된다. 그러므로, 숫자는 별 의미가 없다. 분명하지 않은 수단으로 현상을 붙들어두려고 하니 고통이 따르는 것 같다.
물론 얼마나 얻고 잃을 것인가를 따지는 일은 굉장히 중요하다. 특히 수(數)로써 지탱되는 현대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만 따지고 앉아 있으면 탁상공론이 난무하고,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할 수 있다.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듯한 상대에게(상태에) 투자한다는 게 실수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래는 오지 않았기에 ‘그렇게 될 리가 없다’며 부정할 수도 있지만, 오지 않았기에 ‘그럴 수도 있다’며 긍정할 수도 있다.
기득권층을 향해 바깥의 범인(凡人)이 말하는 미래를 그럴 리가 없다며 밀쳐낼 필요는 무엇인가? 밀쳐낸다는 것은 이미 그 미래가 그럴 수 있음을 방증한다. 불안하기 때문에, 정말 그렇게 되어 자신의 기득권을 잃을지도 모르기에, 끊임없이 그 미래는 부정된다. 그럴 수(手)는 없다며, 그럴 수(數)가 없다며 말이다. 정말 그럴까? 수(數)를 내려놓을 때, 오히려 더 많은 수(手)가 생기지 않을까 싶다. 무한히 많은 수(手)가 무한히 많은 수(數)를 내놓을지도 모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