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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May 03. 2023

선남선녀(線男線女)

  「해님 달님」에서 호랑이는 오누이가 기도하자 튼튼한 동아줄이 내려오는 걸 보고, 자신도 하늘에 기도한다. 줄이 내려오기는 했지만 썩은 동아줄이었고, 결국 올라가려다가 떨어진다. 그래서 수수밭이 붉다는 전설로 연결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아마 해님 달님 이야기가 2023년에 지어졌다면, 오누이는 ‘텔레포트’로 이동했을 것만 같다.      


  ‘무선 마우스와 무선 키보드’는 기본이고, ‘무선 충전기’, ‘블루투스’, ‘와이파이(IoT)’ 등 선(줄, 끈) 없이 연결되는 기술이 많다. ‘선’이 없을 뿐이지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나 ‘전자기파’를 이용하는 것일 텐데, 어쨌든 눈에 ‘선’이 ‘보이지 않기에’ ‘깔끔’하고 ‘편리’해 보인다.     

  ‘선이 없는 물건’이 점점 늘어나면서, ‘선이 있는 물건’은 ‘홀대’받는다. ‘선이 있는 물건’은 우선 거추장스럽다. 전선 뭉치가 가득한 책상을 바라보면서 모든 것이 선 없이 연결된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거추장스러움은 신체적 정신적 불편함을 가져온다. 유선 이어폰을 꽂고 러닝머신을 달리던 때를 상상해 보면, 어떻게 달렸나 싶다. 여기저기 걸리고, 부딪히는 이어폰에 신경 쓰느라 제대로 달리지도 못했던 것 같다.     


  인간관계에서도 ‘선(줄, 끈)’이 많은 의미를 지닌다. 좋은 면보다 안 좋은 면이 많았으므로 인간관계에서도 ‘선’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불필요한 선물이 없어야 하고, 면접을 볼 때도 연줄을 파악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입학 시기가 다가오면 교직원에게 본교 입학을 준비하는 친인척이 있는지 조사하는 것도 모두 ‘선’을 잘라내기 위해서다.      


  그러나 인간관계에는 분명 ‘선’이 필요하다. 블루투스로 연결하는 제품의 불편함은 기기들 사이에 응답이 없을 때다. 무응답의 원인을 눈으로 짐작할 수도 없다. 그저 ‘주변에 기기를 찾을 수 없습니다’라는 메시지와 ‘새로고침’ 사이를 오가며, 전전긍긍한다. 멀쩡해 보이는데 왜 연결할 수 없다는 거지? 바로 옆에 있는데 왜 찾지 못하는 거지? 차라리 선이 있었다면, 뺐다 꽂을 수 있을 텐데, 플러그나 유에스비 단자에 먼지가 없는지 후-후- 불어 가며 해결해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Entrapment>에서 캐서린 제타 존스가 레이저 그물을 빠져나갔던 것처럼, 우리는 인간관계에서는 잘 보이지 않더라도 끈이 존재하기를 바란다. 아무리 ‘선’ 없이 공정하게 유지되기를 바란다고 하더라도, 무심코 연기(煙氣)를 피웠을 때, 그와 나 사이에 끈이 흐릿하게 보이기를 바란다. 그것은 내가 이익을 취하려고 할 때보다, 내가 불이익으로부터 구원받기를 바랄 때 간절해진다. 나와 연결된 사람이 있기를, 그래서 나의 감정과 생각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사람은 간사하다고들 한다. 아쉬울 때는 내가 거부했던 것을 찾는 수가 많다. 우리가 희미하게나마 선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때 오히려 안심한다는 건, ‘함께’의 가치를 중시하는 ‘인간’이기 때문일 듯하다. 다시 말하지만, 그 ‘함께’가 불공정한 연대처럼 보인다면 사회적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과는 별개로, 인간으로서 누군가와 연결되지 않으면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인간관계’는 ‘마음’이라는 ‘블루투스’ 혹은 ‘와이파이’로 연결되지만, 서로 제대로 연결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어 불안해진다. 그래서 ‘선물(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물)’과 ‘용서와 환대(조건 없는 용서와 환대)’가 있을 때, ‘인간관계’에 ‘선’을 확인할 수 있다. 그때 비로소 ‘나’와 ‘남’이 연결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도 가끔 이런 메시지를 받는다.

  노트북 충전을 위해 전선을 꺼낸다. 블루투스 마우스가 고장 난 후 다시 선이 있는 마우스로 교체했다. 블루투스 이어폰 대신 선 있는 이어폰을 사용하고, 와이파이 기능이 있음에도 노트북으로 연결해 인쇄한다. 때로는 그 전선 뭉치가 짜증 나 잘라버리고 싶은 욕망이 치솟지만, 그래도 나는 선이 있는 걸 좋아한다.      


  문득, 어제 아침을 떠올린다. 강의실로 향하는 학생들. “안녕하세요.” 바닥을 보면 걷는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베트남 유학생. 오안이다. “오, 안녕하세요. 수업 가요?” ‘네’ 하고 대답하며 스쳐 갈 뿐인 그에게서 나는 흐릿하게나마 선을 본다. 연결할 수 있는 기기를 찾을 수 없는 푸른 바다에서 표류하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소중한 ‘선(줄, 끈)’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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