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e로써 life 만들기
‘생활인’이라는 말이 있다. 좋아하던 시계 유튜버였는데, 이 사람이 점점 생활인답지 않은 시계들을 소개하면서는 잘 보지 않는다.
어쨌든 그가 말하던 ‘생활인’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상을 바쁘게 살아가지만, 시계를 수집하기를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사치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취미생활을 즐기려는 사람을 포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생활인’은 최근 수필 쓰기 수업에서 전해 들었던 ‘Living’에 갇힌 사람일 것 같다.
생활은 행동으로 유지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Living이라는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그런데 조금 더 억지를 부려 보면, ‘Living’과 ‘Life’로 구분하는 것으로는 조금 부족한 것 같다.
굳이 ‘ing’를 붙이지 않고 ‘Live’와 ‘Life’로 구분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살아있음’과 ‘삶’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삶이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하는 삶이든 우리가 살아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살아있음’이 저절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기에 ‘삶’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그 노력은 대단한 것일 수도 있고, 최소한일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인생을 바라보며 쉽게 노력 여부를 판단하고는 한다. 이른바 청춘들이 꼰대들에게 화가 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따뜻한 ‘라떼’ 한잔을 손에 들고는 그건 너희들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쉽게 말해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지 않더라도, 그들의 ‘라떼’는 오래전에 탄 것이라 하기에는 따뜻하기만 하다.
누군가의 삶을 구분하여 개념화하는 게 바람직한가를 생각한다. 나 자신의 행실부터 반성해 본다. 모든 사람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삶은 입술을 살짝 더 깨묾으로써 유지된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믿는다. ‘Living’을 벗어나 ‘Life’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모여서, 많은 사람이 이미 누리고 있던 ‘Life’를 ‘Living’의 늪으로 끌어들이는 건 아닐까? ‘Live’를 ‘Life’로 만들기 위해 보일 듯 말 듯 입술을 깨물며 인내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두렵지만, 이제는 마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