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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May 04. 2023

열 번이나 찍으면 그 나무는 죽는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의 이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은 꾸준한 노력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듯하다. 그러나 쓰러진 나무의 비극적인 최후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나무는 실로 쉽게 베인다. 캠퍼스에 있는 소나무는 4월 중순부터 말까지 내내 가지치기를 당했다. 잘려 나간 가지에는 송화가 가득했다. 눈물처럼 꽃가루가 날고 있었다. 그게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리라.     


  한국어를 가르치다 보면, ‘에/에게’의 쓰임이 ‘무정물(無情物)’과 ‘유정물(有情物)’에 따라 달라진다고 설명할 때가 있다. ‘에’는 생명이 없는 사물이나 장소 따위에 쓰이지만, ‘에게’는 생명이 있는 사람이나 동물에 쓰인다는 식이다.      


  그런데 “꽃에 물을 주었다”와 “꽃에게 물을 주었다”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익숙한가 질문하면, 많은 사람이 꽃에 물을 주는 편이 더 익숙하다고 대답한다. 혹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고도 한다. 이에 관한 전문적인 논의는 riss나 DBpia에서 검색해 볼 수 있겠다.      


  국어학적인 분석을 떠나 철학적으로는 ‘식물’을 ‘생명이 없는 사물’처럼 여기는 일이 빈번하다는 점을 떠올릴 수 있다(조정옥이 막스 셸러의 철학을 해석한 『감정과 에로스의 철학』을 참고하자). 식물은 움직이지(이동하지) 않고, 햇살과 빗물을 받아들이며 성장한다. 햇살을 찾아 나서지 못하고, 빗물이 없을 때도 줄기 속에 물을 저장하거나 그게 불가능하다면 말라갈 뿐이다. 이처럼 식물은 수동성의 상징이다. 능동적 운동성을 가지는 동물, 동물 중에서 가장 고등한 인간의 기준에서는 식물은 유정물이라기보다 무정물에 가깝게 느껴지는 듯하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라는 속담은 철저하게 운동하는 존재로서 인간에 맞추어져 있다. 찍어 넘어지는 대상을 향한 마음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넘어뜨린다는 목적만이 존재한다.      


  데이트 폭력(광범위하게는 사랑을 핑계 삼아 저지르는 모든 범죄가 여기에 해당하겠다) 근절을 향한 캠페인에는 열 번 찍어 나무를 넘어뜨리려는 생각과 시도 자체가 범죄임을 분명히 전하고 있다. 나무를 생명체가 아닌 사물처럼 대하는 것 자체가 폭력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항상 나무처럼 존재했다. 한 자리에 뿌리내린 채 남성이 주는 햇빛과 물을 받아 생존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아내에게 주어진 자리는 집안이었으며, 집안에서 남편이 벌어주는 돈으로 군말 없이 살림을 꾸려야 했다. 남편이 화를 내면 당연히 화를 받아들여야 했으며, 절망감에 빠진 남편이 아이들과 자신을 살해하고 자살하려 할 때도 하릴없이 죽임을 당해야 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주위의 무관심 속에서 들불처럼 집안 전체로 번져가는 폭력에 저항하다 남편을 살해하기라도 하면, 세상이 뒤집혔다. 가부장적 문화가 뿌리 깊게 존재했으므로,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는 것은 극도의 범죄라고 인식했으리라. 더하여, 나무처럼 수동적인 존재가 나무꾼이라는 능동적인 존재를 살해했으니, 그것이 얼마나 치밀하고 철저하며, 더 많은 노력을 들였겠느냐는 식의 해석이 뒷받침된다. 아니, 차라리 밑바탕이 된다.     


  지구촌 곳곳에 여성은 나무처럼 뿌리 박혀 있다. 여성이 그들의 목소리를 외치는 일이 지나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나무가 뿌리박힌 존재라는 사실을 잊은 채, 나부끼는 가지가 요란스럽다고 핀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망갈 기회조차 주지 않는 문화 속에서 남성의 도끼질을 감당해야 하는 가혹한 운명이다. 나무를 넘어뜨린 나무꾼(남성)의 성취감 속에 쓰러진 나무(여성)의 피눈물이 출렁이고 있다. 그 끔찍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열 번 찍으려는 시도가 아홉 번, 여덟 번으로 줄어드는 아니, 나무 밑에 앉아서 열매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바보 같은 사랑으로 나아가는 마중물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아, 나무가 싫다면 기꺼이 일어나 떠나겠다는 각오를 하고서 말이다. 


*필자 역시 지독한 가부장이며, 한국 사회의 어두운 남성성을 가지고 있다. 고쳐야 한다 없애야 한다는 비판의 타당함을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달라지려는 노력이 성공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이 남성성이야말로, 열 번 찍어 넘어뜨려야 할 나무가 아닐까? 물론, 아직 넘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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