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K 김동욱 <미련한 사랑>을 모창 하면서 아들을 웃게 만들고, 아내를 야유하며 찌푸리게 만들면서 재미있게 놀다가, 문득 아들에게 원곡을 선사하고 싶었다. 원곡을 듣는 아들이 재미있어한다. 다 듣고 나니 연관에 뜨는 제목이 JK 김동욱의 <그녈 위해>다.
위대한 mp3 시대, ‘소리바다’라는 잊힌 대양이 떠올랐다. 시커먼 그 바다에서 조폭 마누라 삽입곡인 JK 김동욱의 <편지>라는 노래를 들었다. ‘임재범-편지’라는 이름의 파일이 수도 없이 떠다니고 있었다. 의심이 많은 편이어서 음색이 조금 다른 것 같아 끊임없이 검색했었다. 임재범이 진짜 부른 것인지 임재범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인지를 알아내고 싶어 나도 망망대해를 둥둥 떠다녔다.
아무튼 2002년에 나온 JK 김동욱의 <그녈 위해>는 영화 <엽기적인 그녀>(2001)에서 견우가 그녀가 소개팅한 남자에게 당부하는 장면을 오마주한 듯 보인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등을 당부한다. 그리고 그녀 곁에 영원히 머물러주고, 눈물 흘리게 하지 않기를 당부한다. 이런 부탁을 하는 내 마음을 당신도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는 말도 함께.
하동균의 <그녀를 사랑해 줘요>도 사정이 비슷하다. ‘너’는 연인과 다툰 모양이고, 하필 ‘나’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다. 둘은 연인관계가 아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나’는 ‘그 사람’을 향한 분노와 상처받으면서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여자(가스 라이팅은 아니겠지?)를 향한 답답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결국 그녀를 사랑해 달라고 부탁한다.
몇 주 전에 KBS 주진우 라이브에서 스토킹 범죄의 비중이 40대와 50대에서 높게 나타난다는 말을 들었다. 그 뒤에 내용은 차에서 내리는 바람에 듣지 못했지만, 어쩐지 그럴 것 같았다. 그게 나와 그 또래의 남자들이 사랑하는 방식이었으니 말이다. 타인을 향한 무관심과 그로 인해 가능해진 자신감 표출, 쿨한 관계에 관한 동경과 강조(강요), MBTI 학습 후 만남과 같은 요소들이 반영된 인간관계(색인 관계)가 이 시대 젊은이들의 주요 특징이라고 가정할 때,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숨기고 다른 사람에게 ‘나’ 대신 잘해주기를 부탁하던 그 시대의 감수성이 ‘사랑’이라는 이유를 대며 범죄를 유발하기에는 오히려 충분해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모든 사랑의 첫 단계는 혼자서 불씨를 키우는 일이다. 그러나 <마음의 소리>에서도 “혼자 좋아하는 건 괜찮지만, 혼자 사귀는 것은 안 된다고 타일러 주었다”라는 식의 대사가 나오듯이, ‘외사랑’(알다시피 김광석의 명곡이다)이나 ‘짝사랑’(주현미의 명곡, 나의 애창곡 중 하나)이 지속될 때 그것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면, 폭력으로 표출될 가능성이 없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확실히 사랑, 혹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과정에도 정당성이 있어야 하고, 법적으로 판별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음은 쓰게 느껴진다. 그러면서 오래 묵은 재생목록을 더듬어 보는 것이다. 좋아하는 노래들은 억눌린 욕망을 혼잣말로 표현하는 것들임을 알게 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눈물을 훔치고, 그런 행동에 감동받을 여자가 없음에도 굳이 그녀의 남자에게 경고나 당부를 남기는 모습들. 그건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이별 후에도 그녀의 연애 사업에 주주로 참여하고자 하는 삐뚤어진 욕망, 이기적인 마음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다.
물론, 그런 음악을 들으며 자란 남자가 모두 나처럼 억눌린 욕망의 소유자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강조하는 ‘남자다움’의 형태가 ‘눈물샘’을 제거함으로써 다듬어졌음을 인정해야 할 듯싶다. 그게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