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한국어 강독 보강 마지막 날. 교재에는 ‘자기애(自己愛)’에 관한 지문이 실려 있었다. 요점은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자기애에서 비롯하는데, 그것은 진정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기보다 과시하고 싶은 욕망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현대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상품화하면서 경쟁력을 길러야만 한다. 특히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자본재(資本財)로 만드는데, 한 사람의 외모와 성격도 포함한다. 그래서 우리는 팔릴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모습을 띠려고 노력한다. 교정과 시술을 포함한 성형과 극단적인 다이어트, 과도한 스펙 경쟁과 많은 사람에게 주목받기 위한 행동이 모두, 자기를 훌륭한 자본재로 만들 길을 열어준다.
적어도 선구적 역할을 했던 사람은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저 재미있기에 했던 일들로 유명해져서 공식적으로 업무협약을 제안하는 업체가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본재로서 성공적으로 데뷔한 누군가가 나타나면, 그 뒤를 잇는 사람들은 자기표현을 향한 순수한 욕망보다는 그 뒤에 가질 수 있는 부와 명예에 집중하게 된다. 잿밥에 더 관심을 가지는 일이 일어난다.
자기애는 상당히 어려운 말이다. 몇 번 쓴 적이 있었지만, 자기애에서 자기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칼 G. 융은 자기는 의식과 그림자 무의식 전체를 아우를 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긍정하고 부정하는 나의 모습은 오로지 의식과 의식 밑에 드리운 무의식의 그림자일 뿐이다. 긍정과 부정의 작업이 순전히 이성적으로 작동한다고 볼 때, 여전히 자기는 의식적 수준에서만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림자는 대체로 다른 사람에게서 꼴 보기 싫어하는 모습들이나, 내가 굉장히 부러워하는 어떤 것을 통해 나타난다. 다른 사람의 특정 행위가 꼴 보기 싫은 이유는, 사실 그 행위의 가능성이 나의 무의식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행위를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했을 때 그에게 불같이 화를 내거나, 저주에 가까울 만큼 비난하는 이유는, 그런 행위로써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님을 각인하기 위해서란다. 타인을 부러워하는 것은 보다 솔직한 모습이겠다. 나에게 결핍된 부분이 타인에게 발견될 때, 그것을 부러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는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려는 자위행위를 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이부영, 『그림자』 참고)
아무튼 이처럼 의식이 작동하는 사이에 진정한 자기의 발견은 요원해진다. 어쩌다 마주친 날 것 그대로의 나는 애써 부정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믈라덴 돌라르가 분석한 것처럼, ‘생각=존재함’의 연결은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로서 유명한 철학자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 존재는 거대한 무의식과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의식, 그 사이의 그림자로서 구성된다. 그런데 ‘생각한다(모든 이성적인 활동: 언술 활동 전체)’라고 말하는 순간, 존재 자체로서의 무의식(언술할 수 없지만 나의 근간을 이루는)은 은폐된다. 따라서 ‘생각하는 나’와 ‘존재하는 나’는 결코 병존할 수 없다(믈라덴 돌라르, 「무의식의 주체로서의 코기토」(슬라보예 지젝 엮음, 『코기토와 무의식』), 특히 51면 도식을 참고.). 쉽게 말해, 말로써 드러나는 나는 그 뒤에 가려진 나를 결코 표현할 수 없다.
부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도 ‘단지 이름이 그러할 뿐이다’라는 말을 굉장히 자주 한다. 예컨대, “여래가 제일바라밀이라 말한 것도, 실상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일 뿐이기 때문이다.”(홍정식 역해, 『반야심경/금강경/법화경/유마경』, 115-116)라고 말한다. 부처는 언어의 허무를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표현하기에 번뇌가 일어난다. 그것은 단지 누군가를 향한 것일 수도 있으나, 나 자신을 향한 말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야.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저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라는 온갖 언표행위들은 나를 수많은 가이드라인에 가둬 죽일 수 있다. 그래서 말을 아끼라는 것이고, 묵언과 명상을 중요한 수행과정으로 보는 듯하다.
자기애는 “자기의 가치를 높이고 싶은 욕망에서 생기는, 자기에 대한 사랑.”이라고 풀이되어 있다(『표준국어대사전』). 이런 풀이는 자기와 사랑 사이의 잔혹한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자기를 사랑하는 행위가 자기의 가치를 높이고 싶은 욕망에서 생긴다면, 그 욕망은 얼마나 많은 훈련과 인내, 다그침과 반성, 희망과 좌절로 범벅되어 있을까? 나의 가치를 높여야만 한다고 말하면서 괴롭히는 중에도, “이게 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야”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친구 사이 연인 사이, 부부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수없이 목격한 바로 그 메커니즘을 반복하는 게 아닐까?
여성주의(女性主義)는 남성적 인류가 ‘여성’이라는 이름에 투사하여 거부하던 열등(하다고 믿었던)한 속성과 가치의 복권을 주장하고, 나아가 여전히 남성중심주의가 남아 있는 사회문화구조를 향한 비판을 수행한다. 비록 그것이 정치운동에서 시작하였기에, 여전히 ‘남성 vs 여성’이라는 정치적인 대결 구도에 갇혀 있다고 하더라도, 철학적으로 ‘여성주의’는 세상을 구원할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여성(女性)’을 여성(余性)으로 돌려주고자 했다. ‘나(余)’를 말할 때, 배제하고 은폐당했던 ‘나머지(余)’. 그것을 끌어안을 수 있을 때, 진짜 ‘자기애’도 가능할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이 나의 여성주의(余性主義)다. 이 보잘것없는 생각은, 그 보잘것없음으로, 남성과 여성 모두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 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