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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Sep 10. 2023

여전히 문제는 술..?

남성이 폭력적이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성이 여성에 비해서 극단적인 폭력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은 건 부정할 수 없다.


그건 사회 문화적으로 강조하는 '남성다움' 연결된다. 남성은 남성다워야 하고, 그것은 인내심과 참을성 같은 것과 연결된다.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남성의 덕목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남성도 유년기에는 감정을 솔직히 표현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지만, 성장 과정에서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체제나 규칙에 순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한다. 요컨대 사회가 요구하는 젠더 역할에 맞춰 살아간다. 페르소나(persona)를 가지고서.


문제는 이 과정에서 해소하지 못한 감정이 마음속에 누적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젠더 역할이 자신에게 꼭 맞다면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에게 맞지 않다면 문제다. 그렇게 억눌려 누적된 감정(그림자)을 해소할 적절한 방법이 없을 때, 조건이 성립되면 폭력적인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발화점?


그림자는 "자아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그늘에 속하는 인격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자아의식으로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성격,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해 온 바로 그 성격"이라고 한다. "우리가 대인관계에서 버럭 화부터 내는 것은 우리 무의식의 '아픈 곳'이 건드려졌기 때문이며 '아픈 곳'이란 곧 격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 무의식의 콤플렉스"라고 한다(이부영, 『그림자』, 89-90면).


니체가 디오니소스를 긍정했을 때, 그것은 인간의 삶을 짓누르는 도덕의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함으로 이해된다. 억눌린 감정의 해제는 대체로 술과 연결된 경우가 많았다. 공동체의 집단 축제는 특정 기간 동안의 억눌린 구성원의 감정과 불편한 관계를 무질서한 상태에서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공동체 차원에서 제공한다. 또한 개인의 묵은 감정이 해소됨으로써 다시 공동체는 적절히 유지될 수 있다.


술은 억눌린 감정, 무의식의 영역에 갇힌 감정들이 쏟아져 나오게 만들기도 한다. 술을 마시고 울거나, 화를 내거나, 물건을 집어던지는 극단적인 행동은 물론이고 술에 취하면 스킨십이 늘거나, 과묵한 줄 알았는데 수다스러워지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이 양상이 또 다른 단계로 넘어갔을 때 폭언과 폭행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연애 담론에서도 술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과거 연애와 결혼 서사에서는 남자친구에게 여자의 아버지가 꼭 ''을 권한다. 술 마시고 보이는 모습으로 가부가 결정된다. 술을 마시고 흐트러지는 남성은 일상 속에서 자신의 감정이나 욕망의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산다고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에 취해 인사불성으로 주정을 부리는 남자친구는 전 날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시 찾아가 무릎 꿇고 싹싹 빌면서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며 허락을 구한다. 허락을 해 주어야 할까? 말뿐인 약속을 어겨 딸을 고생시킬 것을 생각하면 불허가 타당한데, 불허했다는 이유로 술을 퍼 마시고 횡포를 부릴 것을 염려하면 허가 타당해 보인다. 진퇴양난.


술을 마신 후의 모습이 진짜인지, 술을 마시기 전의 모습이 진짜인지를 두고 고민하는 것은 어리석다. 무의식도 자아의 일부인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짜 건강한 자아라면 무의식과 의식의 균형을 맞추어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통합할 수 있는 수준의 수양이 필요하다. 그것이 통합된 인격체로서 '자기(Self)'이다.


술을 마신 후의 모습도 진짜고, 술을 마시지 않은 모습도 진짜이다. 다만, 술 마신 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상, 그 사람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느냐는 의심이 똬리를 틀고 들어앉는다. 술을 마시지 않고 수년 십수 년이 흐른 뒤에 '이제는 아무렇지 않겠지?'라고 안심(방심)하고 다시 술자리를 가졌다가도 예의 '공포'를 재 경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0.1%도 가능성은 가능성이니. 


술을 마시지 않은 나(persona)와 술에 취한 나(self) 사이의 균형(Self)을 찾아가는 수양 과정에 모든 가족과 친구가, 모든 연인이 스스로를 희생하며 동반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할 수도 없고.


수양은 자신만의 몫이다. 술과 술자리를 좋아해 그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 술로도 파괴되지 않을 통합된 인격체로서의 자기(Self)를 완성해야 하고, 그럴 자신이 없다면 술과 술자리(self를 소환할 수 있는 가능성)를 포기해야 한다. 차마 그것을 포기할 수 없다면 가족 친구 연인(persona로 관계 맺어야 유지할 수 있는 관계)을 포기해야 할 테고 말이다.


수많은 종교와 철학에서 이분법적인 사유를 금하라고 하지만, 속물인 나로서는 오직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없다"라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할 자신이 없다면 가면(persona)을 맨 얼굴 위에 단단히 고정하려고 선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나의 모습을 persona, 그 이면에 감추어진 나의 모습을 '그림자'와 'self', 그 둘을 통합한 인격체로 Self를 사용했다. 이부영의 『그림자』(한길사)에서 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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