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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Jul 29. 2023

무한의 골목

서면으로 향했다. 아들 유치원 방학 첫날이다.


아내가 결혼 전, 나와 함께 가서 눈 수술을 받았던 병원으로 매년 정기검진을 다닌다. 시력은 정상인지, 눈에 다른 문제는 없는지를 검진하는 것으로 안다. 당시 첨단기법으로 라식 수술을 받은 아내의 눈은 지금까지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모처럼 우리 식구가 설렌다. 아들은 근처 백화점을 누빌 생각에 들떠 있고, 반촌 동네를 벗어나 시내를 다닌다는 생각에 나도 아내도 괜히 들뜬다. 그렇다고 거창하게 뭔가를 소비하고 돌아올 것도 아니지만.


안과는 새로운 터를 잡아 이사를 했다. 익숙한 길을 달려 부산 시내에 도착하니 아니나 다를까, 길이 꽈-악 막혔다. 겨우겨우 서면에 도착해 안과 건물 근처에 다다르니 내비게이션은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돌아 나올 것을 권했다. '좌회전'과 '유턴'이 거의 없는 부산 시내의 도로 사정을 반영한 결과다. 그냥 무시하고 직진으로 한참 갔다가 유턴할 수 있는 곳에서 돌아올까 싶다가도, 친절한 내비게이션 씨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 차를 오래 탄 아들도 지겨워하던 참이다.


골목은 좁다. 그래서 두렵다. 1600cc 자동차를 타고 다닐 때도 그랬다. 2000cc 자동차로 바꾼 뒤에는 한동안 익숙하지 않은 차 크기 탓에 더욱 두려워졌다. 좁은 골목에서 행인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마주 오는 차에 순서를 양보하면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왼편에 택배 트럭이 정차해 짐을 내리고 있었다. 충분히 아주 천천히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오른쪽에 있는 커다란 반구형 화분(지자체에서 환경정비를 위해 설치한 것이리라) 때문에 긴장했다.


어떻게든 지나가려고 차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잘 들어갔다. 그런데 택배트럭 옆에 붙은 열린 문을 고정하는 고리에 사이드미러가 드드득 걸려 버렸다. 후진하려 해도 트럭을 놓지 않으려고 하고, 접으려고 하니 득 득 득 말을 듣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싶어 반대로 꺾이기를 각오하고 후진했다. 역시 앞으로 완전히 꺾인 사이드미러는 그래도 버튼을 몇 번 누르니 제자리로 돌아왔다. 택배 아저씨는 내가 폭이 좁다고 생각해서 못 나가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짐을 정리하다가 옆으로 나와 보더니, 자리가 충분히 있다며 오케이 사인을 준다. 한번 긁힌 만큼의 공간은 이제 내 감각에 들어앉았다. 여유 있게 빠져나와 안과 건물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아들이 즐겨보는 '한블리'에서 나왔던 주차 타워다. 원래는 동승자들이 모두 내린 후에 운전자만 들어가서 차를 넣고 내려야 하는데, 정신이 없어서(제법 차를 아끼는 편이다) 그냥 들어가서 차를 넣고 모두 함께 내려서 밖으로 나왔다. 관리인 아저씨는 그렇게 하시면 안 된다고 말했다. 아차 싶었다. 미안하다 주의하겠다고 말하고 진료신청을 하러 올라갔다.


대기실에서 아들은 옆에 화분만 없었더라면 충분히 나갔을 텐데라며, 한문철 변호사나 한블리 패널이라고 된 것처럼 분석했다. 그래, 그런데 그냥 아빠가 운전을 잘 못해서 그런 거다고 했다.


안과는 전망이 좋았다. 네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들은 지나가는 버스와 신호등을 보느라 신이 났다. 도로를 참 좋아한다. 아들은 '생활거리' 속도 제한 표지판을 알려준다. 아, 맞네. 생활거리는 사람들이 많이 다닌다는 뜻이야. 문득, '아차! 생활거리!'


골목은 두렵다. 단순히 길이 좁아서가 아니었다. 그곳은 그 길을 사이에 두고 정착한 사람들의 생활이 밀도 높게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잘 알지 못하는 그들의 생활. 그 익숙하지 않은 생활 속으로 비집고 들어서는 것은 언제나 두려운 일이다. 택배 아저씨의 생활, 택배를 받아야 하는 그 집 주민의 생활, 상점 주인들의 생활, 그곳을 지나다니는 시민들의 생활, 그 골목에 활기를 불어넣어야 하는 지자체 공무원의 생활까지. 그 복잡하고 조밀한 생활 속에서 나는 '나만의 공간'에 들어앉아 좁다고 부딪힌다고 긁힌다고 징징거리고 있었던 거다.


아들은 계속 밖을 본다. 지루함을 달래려는 게 분명하다. 버스 번호를 읽다가 '구천구백구십구' 번 버스를 상상하며 외치는 아들에게 나는 '구천구백구십구만구천구백구십구'를 외쳤다. 아들이 까르르 재미있어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숫자냐며. 그래, 어디 보자. '구천구백구십구억구천구백구십구 만 구천구백구십구'(아~ 까르르) '구천구백구십구 조 구천구백구십구 억 구천구백구십구 만 구천구백구십구'(아~ 정말~ 까르르)를 계속 이어가 본다. 구천구백구십구 조 다음은 무엇이냐고 묻는 아들에게(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읊었던 아들) 나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한한 세상을 알려준다. 구천구백구십구 경 구천구백구십구 조......


내가 모르는 삶이 빼곡하게 들어찬 골목 아니 생활거리를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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