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막연한 계획이 있었다.
왠지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고, 무모했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
40대에는 포르셰를 탄다거나, 연세대학교를 입학한다거나, 4층짜리 집을 지어 산다거나 하는 다소 현실적인 계획들을 세우곤 했는데, 물론 대다수의 계획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중의 한 가지가 세 아이의 아빠가 되는 것이었다.
2015년은 몇 년간의 폭풍 같은 시간을 보낸 후 우리 가족이 오롯이 새로 태어난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말 여러 가지 바닥을 치는 불운과 위기와 괴로움과 고통 가운데 몇 년을 보내고, 그 한가운데서 지오가 생겨났다. 가족의 해체까지도 생각하고 있던 그때에, 이미 정관수술을 한 이후에, 그러니까 쉽게 말해 아이가 생길 일이 전혀 없었던 상황 가운데 기적처럼 지오가 생겨났다. 그리고, 함께 살던 부모님과 분가하여 살기로 결정을 한다.
김포에 오게 된 일화는 장황하고도 조촐하다. 반포에서 분가해 아이들 학기를 다 마치기 위해 강남의 한 허름한 빌라에서 몇 달을 보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산 안에서 다섯 식구가 집을 알아보기 위해 돌아다녔다. 정신없고 정 떨어진(그리고 예산도 안 맞는) 서울은 무조건 떠나기로 했다. 인생의 바닥을 치게 한 경기도 남부(용인, 성남, 경기도 광주) 또한 멀어지기로 했다. 지하주차장이 있는 비교적 깨끗한 아파트 단지를 원했다. 앞에 열거한 기준을 대입해 보니 파주가 눈에 띄었다.
싸라기눈이 부슬부슬 내리는 날, 제2 자유로를 한참 달려 도착한 파주는 추웠다. 집 한 군데를 봤는데 가격도 괜찮고, 집도 나쁘지 않았지만 뭔가 맞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일단 차에 다시 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친한 친구에서 안부전화가 왔고, 이러이러해서 파주에 왔는데 왠지 모르게 파주는 우리랑 안 맞는 것 같다고 했더니 파주에서 멀지 않은 곳에 김포가 있는데 거기 신도시가 있다더라 얘기를 해주었고, 바로 검색을 해서 가장 사람 착해 보이는 공인중개사 사무실로 네비를 찍어 달려갔다. 처음 본 집 두 개 중 1층에 있던 집을 바로 계약했고, 그렇게 우리는 김포로 오게 되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었고, 또 여름이 왔다.
7월의 한가운데 날, 예정일이 지나도 안 나오는 건 누나와 형을 닮았구나 하며 유도분만을 진행하게 되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유도분만 약을 넣고, 소식이 없어 장모님과 처남과 함께 근처 김밥천국에 식사를 하러 갔다. 라면을 시켜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내 라면이 나옴과 동시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보호자분 어디 계신가요? 지금 상황이 좀 긴급해서 바로 수술을 진행해야 합니다!"
헐레벌떡 뛰어 대기실로 갔지만 이미 분만실에 들어간 뒤였다. 진통이 오는 와중에 탯줄이 아기의 목을 누르고 있다고, 그래서 긴급하게 수술로 아이를 꺼내야 했다고 설명했다. 제왕절개 수술을 마치고 아내가 회복실로 돌아왔다. 태어난 아이는 구경도 못했지만 다행히 정상이라고 했다. 이번에도 자연출산을 마음먹고 있었던 아내와 장모님은 눈물을 흘렸지만, 그 와중에 나는 '자연분만 때보다 머리 모양은 예쁘게 나왔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세 아이의 아빠가 된 순간의 첫 번째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