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 Francisco의 기억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열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나는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2003년, 난 말 그대로 갑작스럽게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결혼생활을 한 지 2년 만에 UCSF의 한 전망 좋은 입원실에서 우리의 첫 번째 딸 정윤이를 낳게 된다. 영어 이름 Eunice Jungyoon Park.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에는 Medi-Cal이라는 저소득층 의료지원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합법적으로 비자를 받고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들에게도 그 프로그램이 적용될 수 있었다. 덕분에 임신 후 병원 진료와 검사 등을 무료로 지원받을 수 있었고, 일정 기간에 한 번씩은 바우쳐로 마트에서 우유, 시리얼 같은 생필품을 구매할 수 있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어로 의사소통이 힘든 유학생 부부가 많아 한인 산부인과에 다니는 부부가 대부분이었지만, 나는 어느 정도 의사소통에 자신감이 있다는 생각에 교수님 중 한 분의 추천으로 UCSF에 다니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 모든 페이퍼 워크와, 진료와 관련된 의사소통을 어떻게 했는지 아찔하지만, 어쨌든 잘 다니고, 잘 낳았고, 잘 키웠으니 그걸로 성공한 거지.
예정일이 보름 가까이 지나도 출산의 기미가 없자, 유도분만을 하기로 날짜를 잡았다. 짐을 바리바리 싸고 UCSF에 입원을 했다. 사실 10개월 동안, 만약 진통이 올 경우 어떻게 할지 머릿속으로 천 번 만 번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는데, 그 모든 게 소용없게 되어 아쉬우면서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유도분만제가 투여됐고, 무통주사도 맞았다. 그런데 서서히 오는 진통과 함께 다리 무통주사가 반만 먹혔다. 아내는 13시간의 진통과 50% 자연분만으로 첫째를 낳았다.
아이가 나왔다.
손가락, 발가락, 눈, 코, 입, 목청까지 온전했다. 탯줄을 자르라는 의사의 말에 가위를 갖다 댔는데 도저히 하지 못하겠어서 포기했다. 아이를 닦고 그대로 아내에게 안겨주고 초유를 먹게끔 해주었다.
간호사는 수고했다며 얼음물을 가져다줬지만, 오우 절대로 안되지... 장모님께서 끓여주신 미역국을 먹었다.
초음파로만 보던 딸을 만났다.
비로소 아빠가 되었다.
신비롭고 기뻤지만 얼떨떨했다.
마냥 이쁘다기보다는 출산할 때 머리가 보일 때쯤 아기의 머리는 왜 그렇게 물렁물렁하며, 두상은 왜 동글동글한 게 아니고 콘헤드 모양이며, 무엇보다도 내 인생은 이제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빠가 될 준비가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아빠가 되기를 주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