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여행의 무거움이 내려앉다

#02. 그리스 아테네

by bonita

17시간이라는 살인적인 비행시간을 이겨내고 드디어 그리스 아테네 공항에 도착했다.

도착의 감격을 느끼기도 잠시,

내 몸과 같은 배낭을 다시 짊어 메고 서둘러 도심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올랐다.


다시금 오랜만에 시작된 배낭여행에 설레는 마음을 안고

미리 예약해 둔 숙소가 위치한 siggrou/fix 역에 내렸다.

여름휴가 시즌이었지만 한국인 하나 없는 그리스는 생각보다 낯설었다.

아테네 지하철에서 20kg에 육박하는 배낭을 메고

이리저리 길을 찾아다니는 나와 같은 사람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때까진 여행 하루 만에 떠나온 한국을 다시 그리워하게 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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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 한점 없이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아테네를 거닐었다.

걸음을 옮길때마다 불안 불안한 마음이 떠나가질 않았다.

'이게 정말 그리스야?!'

내가 생각한 아테네와는 너무나도 다른 첫 모습에 내 눈동자는 점점 흔들리고 있었다.


여름휴가 시즌에 북적이는 사람들로 가득 찬 아테네가 아닌

인적 드물고 스산한 느낌마저 나는 한적한 길거리가 전부였다.


무심하게 내리꽂는 햇볕이 어깨에 걸친 배낭의 무게를 더 짓누르는 듯했다.

하지만 하늘이 더 무심하게 느껴진 것은 비단 배낭 무게뿐만은 아니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도착한 숙소 앞에서 나는 여행의 첫 좌절을 맛봐야만 했다.


처음으로 도전해본 에어비앤비 숙소였건만 무엇이든 처음은 실수를 반복하게 만든다.

다른 호스텔이나 호텔 하나 보이지 않는 주거단지만 잔뜩 몰려있는 좁다란 동네에서

호스트와 연락이 끊긴 채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밖을 서성이고 있었다.

놓아두었다던 열쇠는 아무리 찾아도 온 데 간데없고,

문 열린 상점이라고 하나 있는 맞은편 베이커리의 그녀는 묻는 질문마다 연신 "No, No." 만 외쳐댔다.

국제전화 요금 폭탄도 주저하지 않고 전화를 걸었지만 무심하게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될 뿐이었다.


정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중 누구 하나도 선뜻 도와주지 않았다.

빌라 앞에서 짐을 한가득 풀어놓고 맥없이 주저앉아 있을 때, 안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눈이 마주쳤고, 딱 봐도 무언가 문제를 맞닥트린 외국인임을 직감했을 터이다.

커다란 배낭을 길거리에 버려둔 채 현관도 못 들어가고 있자 일단 안으로 들어오라며 문을 열어주었다.

더이상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 오고가는 사람들을 경계하며 커다란 배낭을 부여잡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숨통이 트일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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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호스트는 여전히 연락이 되지 않았고,

그나마 할 수 있는 거라곤 와이파이를 잡겠다고 건물 안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뿐이었다.

때 마침 일을 보고 돌아온 그 남자는 아직도 로비에 서성이는 나를 보고는

호스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이 딱한 사정을 전해주었다.


호스트는 미안하다며 가사도우미의 실수로 열쇠를 놓는 곳이 바뀌었으니

맞은 편 베이커리에서 찾아가라고 전했다.

분명 처음 베이커리에 들어가 물었을 때 아무것도 모른다며 답답한 대답 뿐이었지만

다시 한번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역시나 이름을 말해도, 사진을 보여줘도 돌아오는 건 또다시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허탈했다. 이제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

주저앉아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다시 그 남자가 내려왔다.

여전히 우왕자왕하는 소리에 마음이 쓰여 일부러 내려온 눈치였다.

결국 말이 통하지 않는 나 대신에 직접 베이커리에서 키를 받아다 주었고,

나는 말할 수 없을 만큼 감사하고 또 감사해 이내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하늘에서 내려준 천사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인연 덕분에

드디어 오랫동안 애를 태우며 기다린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여행의 첫 시작부터 생각하고싶지도 않은 길거리 노숙은 면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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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떠나오면서 여행이란 것을 너무 쉽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익숙한 것들과 등을 진 채 낯선 것을 향해 떠나온 이 지금,

나는 그동안 수없이 많은 것들을

편하게, 손 쉽게, 마음껏 누리며 살아왔음을 절실히 깨닫는 순간이었다.


하물며 인터넷하나도 연결되지 않는 곳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휴대폰이 있어도 연락이 닿지를 않았고

내 상황을 알고 도와줄 만한 친구들도, 도움을 청할만한 사람들도 없었다.


이토록 많은 짐을 지고 시작한 여행이었지만

정작 내가 가지고 떠나온 짐으론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 허무함이 다시 한번 여행의 무게를 실감 나게 해주었다.


여행은 쉽게 하려면 얼마든지 쉽게 할 수 있지만,

그들의 일상을 함께 하기 위한 여행은 그 무게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일상을 담아내고자 하는 여행에서 그들의 일상은 생각보다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어쩌면 여행자에게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꿈꾼다는 것은 그저 사치일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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