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그들의 일상에 녹아들다

#03. 그리스 아테네

by bonita

아테네에서 두 번째 날,

어제 사다 놓은 빵 몇 조각과 커피 한잔으로 아침을 맞았다.

그리스에 도착해서부터 먹은 거라고는 빵이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또 아침부터 남은 빵을 꾸역꾸역 입에 넣는 순간

'정말 여행을 왔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간단히 아침을 해치우고 아테네의 새로운 모습을 보기 위해 아크로폴리스로 향했다.

월요일이 되었건만 도로는 여전히 냉정하게 달리는 차들과 조용히 걷는 사람들뿐이었다.

문득 둘러본 거리에는 빛바랜 건물들과 표정 없이 서 있는 사람들, 생기 없는 도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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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로폴리스에 다다르자 그나마 내가 상상했던 유럽의 모습이 조금은 보이는 듯했다.

거리에 즐비한 야외 테라스와 그곳에 앉아서 점심을 먹거나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갖는 관광객들.

관광객들이 넘쳐나는 식당에서 그저 그런 음식을 비싼 돈 주고 먹고 싶지 않아 무작정 골목을 돌아 나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그리고 맛있는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식당 하나를 찾았다.

그리스에 도착해서 줄곧 먹은 동네 빵 외에 잘 차려진 첫 음식,

그릭 샐러드와 기로스.

그리고 그 뒤에선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나른한 점심의 한 때를 이어가시는 할아버지.


올리브유에 향긋한 후추가 살짝 뿌려진 그릭 샐러드를 한 입 떠넣는다.

아삭 씹히는 채소들과 꾸덕한 치즈가 금세 입안을 풍성한 향으로 가득 채웠다.

이제야 조금, 내가 꿈꾸던 그리스의 일상을 느낄 수 있게 된 것만 같다.


때론 수많은 유명한 관광지보다 제대로 된 한 끼의 식사가

그 여행지의 한 면을 더욱 명확히 그려내기도 한다.

지금의 이 그릭 샐러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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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티모스, 에파리스토! (맛있네요, 감사합니다!)"

기분 좋은 점심과 함께 새하얀 구름이 머리 위를 떠다니는 아테네의 골목길을 거닐었다.

아크로폴리스 근처라서 그런지 숙소 앞 동네와는 다르게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이곳저곳 골목길을 걷다보면 아테네만의 숨겨진 매력들이 곳곳에서 고개를 내민다.

굳이 대단한 것들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우리가 골목길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여행객들을 상대로 하는 관광지가 아닌 때 타지 않은 그곳의 진실된 모습들이 남아있 때문이 아닐까.


나는 여행을 떠나올 때면 늘 그곳의 골목길을 찾곤 한다.

이왕이면 좁고 구불구불한, 그래서 들어서는 순간부터 묘한 긴장과 설렘이 가득한 그런 골목길을 말이다.

골목길마다 숨겨져 있는 도시의 매력을 굳이 표현하자면

마치 오랜시간 알고 지낸 친구 사이에서 부담스럽게 차려입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내 모든 모습을 거리낌없이 꺼내놓을 수 있는 편안하고 사랑스러운 순간 같다고 해야할까.


그리스의 골목은 투박하면서도 아기자기하고,

무심하면서도 그들의 열정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 상반된 모습이 그리스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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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도가 훌쩍 넘은 그리스의 한낮.

숨이 막힐 듯한 더운 여름은 카페에 앉아 마시는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잔이 제격이다.


잠시 숨을 고를 겸 근처 카페에 들어가 아메리카노를 시원하게 들이켠다.

이렇게 문득 주위를 둘러볼 때면 내가 그리스에 와있다는 사실이 새삼 낯설어지곤 한다.


슬슬 허기가 몰려오자 아테네 시내 구경을 마치고는 집 앞 대형마트로 향했다.

오늘 저녁도 빵으로 때울 수는 없으니 비장의 무기를 꺼내기로 했다.

한국에서 고이고이 챙겨 온 비장의 식재료, 바로 카레가루이다.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직접 끓인 카레에 맥주 한잔으로 오늘 하루를 되짚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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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부터 고생한 탓에 정이 안 가는 아테네라고 생각했건만,

어느새 이곳의 일상에 스며들고 있었다.


불편하던 집이 하나 둘 편해지고,

낯설었던 동네가 익숙해지고,

어색했던 사람들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이렇게 하루하루 내 삶이 낯선 곳에서 천천히 녹아들고 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자연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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