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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ita Nov 14. 2016

숨이 멎을 듯한 설경에 취하는 시간

#얼어버린 발가락에게 마저 고마웠던 날

눈을 떴다.

눈이 많이 내리는 어느 조그만 산골의

한적한 산장에서 살며시 눈을 떴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마당 앞에 수북하게 쌓여있고

옆에 놓인 장작에는 어느새 하얀 눈이 반쯤 덮인

그렇게 고요하고 평온 한없이 눈이 내리는

조용한 산골에서 말이다.     



그런 착각이 이상하지도 않을 만큼

   낭만적인 무언가를

가득 담아내고 있다.     


나도 모르게 일어나자마자

곧장 창문 앞으로 향한다.

오늘은 또 얼마나 많은 눈이 쌓였을지

  렇게 보고 싶었다.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인 동네에

나지막하게 따뜻한 온기가 젖어든다.    


요란스럽지도 소란스럽지도 않게

밤이 가고 아침이 찾아왔다.     



주섬주섬 얇은 옷가지들을 몇 개 걸쳐 입고는 밖으로 나선다.

자코파네에서 볼 수 있다는

모르스키에오코 호수를 보기 위해

아침부터 발걸음을 옮긴다.     


온통 눈으로 채워져 있을 호수의 아름다운 경관을 상상하  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탓에 근처 마트에 들어가 뜨끈한 핫도그를 하나 샀다.     


살짝 데워진 바게트 빵 안쪽부터 가득 채워진 케첩

그리고 무심하게 꽂힌 소시지 하나.

단출하기 그지없는 핫도그이지만

짭짜름하고 고소한 맛이 생각보다 훌륭해

눈 깜짝할 새 비워내고는 서둘러 버스에 오른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빠르게 달리는 작은 버스.

양옆으로 펼쳐진 길쭉길쭉한 침엽수들이

예고 없이 찾아온다.


눈으로 덮인 하얀 도로와

양옆에 빽빽하게 채워진 나무들은

이곳이 낯선 곳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볼 거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여느 북유럽에서나 볼 법한

이국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설경에

그저 말을 잃은 채 달릴 뿐이다.     



고개를 다 들어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쭉하고 촘촘히 뻗은 침엽수들을 바라보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호수 입구에 도착했다.     


걸어서 올라가려면 2시간이 족히 걸는 거리에 마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한다.

살짝 손끝이 시려오는 날씨.

약간은 큼큼한 냄새가 풍기는 나무 수레에

성큼 올라탔다.   

  

마차가 말굽소리를 내고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나뭇가지들마다 하얀 눈을 덮고 있다.

초록빛 나무들과 새하얀 눈밭이 뿜어내는

묘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에 슬쩍 취해본다.


이렇게 조용하고 웅장한 숲 속을 걸으면

어떤 기분일까.

저 눈에 한발 한발 발자국을 찍으며

길쭉한 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걸을 땐

어떤 생각들이 떠오를까.


달리는 마차가 무색하게

이 거리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이 피어오른다.     



차가운 바람을 뚫고 달리던 마차가 이내 멈춘다.

호수 바로 밑 언덕에서 내려

10분쯤 더 걸어가야 한다.     


영하로 떨어진 날씨 탓에 손가락이 얼었는지 마디마디가 벌게진다.

자코파네의 추운 날씨를 미처 예상하지 못한 탓에 따뜻한 옷가지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지만

기어코 호수를 봐야겠다며

두 다리에 힘을 불어넣었다.



 더 걸어 오르자 드디어 호수 앞에 다다랐다.

호수를 보기도 잠시,

일단 얼어붙은 몸부터 녹일 겸

근처 가게로 들어간다.


호수 근처에 달랑 하나 있는 이 가게에는

모두 몸을 녹이기 위해 들어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어렵사리 자리를 잡고 앉아 따뜻한 코코아와

양배추 수프를 시킨다.


 달콤한 코코아 향이 짙게 풍기는 잔을 잡고 있으니 한결 추위가 녹아내린다.        

  


 추위를 달래고 밖으로 나오니

이내 바람이 조금 잠잠해진 듯하다.


얼어붙은 계단을 따라 호수 가까이 내려가 본다.

눈으로 둘러싸인 산과 나무들 밑으로

커다란 호수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이런 장관이 어디 또 있을까.

눈앞에서 마주한 위대한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 다리에 힘까지 풀려버릴 것만 같다.

마치 알프스의 숨겨진 보석을 찾아낸 기분이랄까.     



 흑백영화를 보 

온통 하얀 눈으로 둘러싸인 호수는

아무런 색도 없지만 그 오묘하고 맑은 호수 안에서 투명하게 비치는 하늘과 거대한 산맥이

그 어떤 색보다 아름다운 빛깔을 품어내고 있다.


알프스에 눈이 있다면

이 호수는 알프스의

맑고 깊은 눈동자가 아닐까.     



호수를 뒤로하고 이번에는 마차가 아닌

   .

반드시 이 길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에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내려가는 길로 향했다.


 어쩌 현실이 아닌

허구 속 세상의 한 시점을

거닐고 있는 건지도 모른.


이 나무와, 이 눈길과, 이 하늘과, 이 바람이

현실일 수가 없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설경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현실이라 단연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떤 영화였을까.

판타지 소설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두 남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애틋한 사랑 이야기였던 것 같기도 하고.     


낭만적이기도 평화롭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쓸쓸하고 외로워 보이기도 하는 이 길.


이 속을 내가 걷고 있다는 사실이

왜 그리도 행복하기만 한지.

꿈만 같은 이 시간이

어쩜 그리도 달콤하기만 한지.     


추위도 잊은 채 넋을 놓고 걷고 또 걸었다.     



평생 경험해보지 못할 거라 믿었던 순간들이

눈앞에 나타나는 기분이 이럴까.

아마 다시는 만나보지 못할 순간을

오랜 시간 대면한 기분이 이런 걸까.     


발가락이 얼어오고 코 끝이 벌게지고

손가락이 퉁 부어오르자 그제야 실감이 났다.

이 순간은 현실이고,

내가 있는 곳은 자코파네라는 것을.     



걸어가다 보니 저 높은 산들 위로

 만년설이 보인다.


1년 내내 녹지 않는 눈을 가지고 있는 만년설처럼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경이로운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이곳은 자코파네이다.     



얼어붙은 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길을 걷는다.

1시간 40분 정도를 걸어 내려오니

드디어 입구에 다다랐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설경도 끝이 나고,

꿈만 같던 영화 속 이야기도 그렇게 끝이 났다.     


뻐근해진 발목과 다리가 욱신 욱신 쑤셔온다.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잠시나마 환상에 젖으며 걸었던 그 길들이 다시금 피어오른다.


평생 잊을 수 없을 황홀했던 그 순간들을 그리며

부어오른 다리를 주무른다.     



이내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차가운 날씨에 쉬지 않고 걸었던 탓에

몸이 고되긴 고되었나 보다.

    

더할 나위 없이

새하얀 겨울을 만끽했던 시간.

현실이라 믿을 수 없는 아름다운 설경에

숨이 멎었던 시간.


아마도 지금, 

꿈에서도 그 길을 걷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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