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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ita Mar 25. 2017

뜨거운 커피 한잔, 기어이 내가 사랑하게 될 시간

#유난히 뜨거운 커피가 그리운 날


늦은 아침을 먹고 밖으로 향한다.

분주하게 시작되던 아침이 문득 낯설어지는 순간이다.

가벼운 차림을 하고는 뜨거운 햇살이 거리를 비추는 멘도사의 한낮을 거닌다.

고온 건조한 멘도사의 거리를 낭만적으로 걸을 수 있는 건

어쩌면 거리마다 오래된 나무들이 드리워주는 커다란 그늘이 있어서가 아닐까.


잎이 무성한 가로수들이 빼곡하게 늘어선 거리에는 

저마다 시원한 그늘이 머리 위를 덮는다.

바람따라 햇살따라 나뭇가지에 걸린 그림자가 살랑인다.


왼쪽 오른쪽 어디를 둘러봐도 이 공간엔 

온통 반짝이는 햇살을 머금은 눈부신 초록빛이 가득 스며들어 있었다.



가만히 앉아 숨을 쉬는 초록빛을 두 눈에 가득 담는 것만으로도

천천히 불어 드는 바람에 머리칼을 늘어놓고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수채화로 그려낸 한 폭의 그림이 마치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른한 평온함이 차오른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슬며시 빛을 투과시키는 눈부신 햇살,

살랑이는 바람에 흥겨운 듯 나부끼는 나뭇잎 소리,

그 어느 것 하나 한가로운 오후의 설렘을 담지 않은 것이 없다.


슬며시 걸음을 늦추고 천천히 거리를 둘러본다.

이토록 짙은 푸름이 가득 찬 멘도사와 사랑에 빠진 건 나 혼자가 아니었나 보다.

골목 어귀에서 노트와 펜을 꺼내들더니 한참을 그곳에 서서

내가 걸어온 거리를 그리고 있는 한 남자.


온 하늘을 살포시 덮고 있는 나무들이 영롱한 초록빛으로 물들여놓는 거리는

어느새 현실이 아닌 진짜 그림 속의 한 장면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유로운 한낮의 햇살을 만끽하다 작은 카페로 들어섰다.

공원을 지나다니며 봐왔던 작은 카페였다.

언제고 조용한 오후가 되면 저곳에서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셔보고 싶던 참이었다.

기어코 그곳이 내 발걸음을 끌어당긴다.   


깔끔히 정돈된 실내를 놔두고 굳이 좁은 거리에 

덩그러니 그늘막 하나 놓인 소박한 테라스에 자리를 잡는다.

왠지 모르게 오늘따라 이 바람과 푸른 나무들을 조금 더 가까이서 느끼고 싶었으므로.

나는 기어코 그들 옆으로 다가가 앉는다.


뜨거운 햇살이 거리를 달구는 오후, 

뜨거운 커피 한잔을 시킨다.

설탕도 우유도 넣지 않는 오직 커피만 담긴 진한 한 잔.   



여행을 떠나와서 어쩌면 가장 낯설었던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뜨거운 한여름 햇살 아래에서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보며

도대체 왜 시원한 커피를 마시지 않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더운 날씨에 저 뜨거운 커피가 들어갈까?’

조금만 햇살이 뜨거운 날이면 어김없이 아이스커피를 찾아 마시던 나였다.

결국 나는 여행을 와서도 지독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프랜차이즈 대형 카페를 찾아다니며 아이스커피를 손에 쥐기에 바빴다.


그러던 시간이 흘러 프랜차이즈 카페도 하나 없는 작은 시골마을에 오랜 시간을 머물면서

의도치 않게, 아니 운명적으로 내가 가장 사랑하게 될 시간들이 많아졌다. 


뜨거운 바람이 달구어진 거리 위를 천천히 나부끼는 날,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날들이 많아졌다.

뜨거운 햇살 아래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보내는 따스한 시간을 

결국 사랑하게 되었다.



그들은 왜 뜨거운 커피를 사랑할까?


사실 이건 누구의 대답도 아니다.

하지만 어쩌면 누군가의 대답일 수도 누구나의 대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또 어떤 이유에서 뜨거운 커피를 찾고 있을지 모르지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마시는 이유란,

기어이 내가 뜨거운 커피를, 그 낭만을 사랑하게 된 나만의 이유란.   


한 손에 폭 담기는 작은 잔에 크레마가 진하게 깔린 커피 한잔은

한 김 한 김 식혀가며 천천히 넘기기 좋다.     

더운 날 아이스커피처럼 후루룩 넘기지 못해

천천히 커피의 향을 음미하며 마신다.

그래서 작은 잔에 담겼어도 오랜 시간을 두고 마신다.

오랜 시간을 앉아있다 보니 커피 잔을 들었다 내려놨다 하는 사이에

수많은 것들이 두 눈을 가득 채운다.     


평소에는 쉽사리 지나쳐버리는 거리의 모습마저도

뜨거운 커피 한잔과 함께라면 

보이지 않던 모습들까지 새삼스레 다가온다.



무심히 지나쳤던 거리의 색감,

흔들리는 나뭇잎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냄새,

낯선 듯 귓가를 맴도는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는 순간

나는 기어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을 내뱉고 싶어 졌다.


그렇기에 뜨거운 커피 한잔을 손에 쥐고 있는 시간은

깊고 진한 커피의 향을 오래도록 즐기며

나와 함께 흘러가고 있는 순간들을 천천히 잡아둘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시간임에 틀림없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여주는 고마운 시간임에 틀림없다고 말하고 싶다.



급하지 않아서 좋고

짧지 않아서 좋다.     


일상처럼 다가와 좋고

일상처럼 다가오지 않아 좋다.


정신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하루에

가끔은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한 틈을 선물해주는 건 어떨까.     

오래도록 내 옆에 두고 내 기나긴 하루의 이야기를 들어줄 따뜻한 시간 한 틈을.


복잡하게 엉켜 붙은 생각들과 넘어질 듯 빠르게 달린 시간들에서

놓쳐버린 수많은 내 하루의 조각들이 조금은 고개를 내밀 수 있게,

조금은 나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게,

따스한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 한잔과 함께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잠시 놓아두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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