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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수집하는 아이

바람을 담는 방법

by 피터팬


바람이 자주 부는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엔 누구도 가까이 가지 않는 오래된 오두막이 있었고,

그 안엔 한 아이가 살고 있었다.


아이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바람을 수집하는 아이’라 불렀다.


아이는 늘 낡은 유리병을 들고 다녔다.

날이 흐리든 맑든, 눈이 내리든

바람이 부는 날이면 아이는 언덕 위, 골목 사이, 정류장 뒤편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바람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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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 눈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이의 귀에는 분명히 들렸다.


“미안해.”

“가지 말아줘.”

“사실은, 나도 네가 좋았어.”


그건 바람에 실린 말들이었다.

마음속에 삼켜버린 말, 끝내 내뱉지 못한 속마음,

잊히기를 바라지만 끝내 사라지지 않는 감정들이

바람이 되어 떠돌고 있었다.


아이는 그 바람을 병 속에 조심스레 담았다.

그리고 오두막 안, 창문도 없는 방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병마다 조그만 라벨이 붙어 있었다.


'첫사랑이 떠난 날의 바람'

'할머니를 보내던 아침의 바람'

'혼잣말로 한 고백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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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그 병을 가끔 꺼내 듣기도 했다.

유리병을 귀에 대고 눈을 감으면,

그날의 공기와 목소리와 온기가 느껴졌다.


그렇게 수많은 바람이 아이의 방을 채웠다.

그건 누군가의 슬픔이었고, 누군가의 기도였고,

누군가의 잊혀진 하루였다.


어느 날, 아이는 아주 낯선 바람 하나를 발견했다.


그건 아무 소리도, 아무 냄새도 없는 바람이었다.

병에 담아도, 귀를 대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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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병을 들여다보다 아이는 깨달았다.

그건 미래의 자신이 흘릴 바람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어디에도 담지 못할 바람.


아이는 조용히 창고 문을 닫고,

지금껏 모은 모든 바람 병을 하나씩 꺼냈다.


그리고 언덕 위에 올랐다.

하나씩 병을 열자, 바람이 다시 날았다.


소리도 없이, 빛도 없이.

하지만 분명히, 어딘가로 닿아갔다.


아이의 마지막 바람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던, 나의 하루'


그날 이후로 아이를 본 사람은 없었다.

오두막은 비었고, 방엔 병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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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언젠가부터 마을 사람들은

낯선 순간, 익숙한 바람을 느끼곤 했다.


“응?”

“이 냄새... 어디서 맡아봤지?”

“이 기분... 이상하네, 꼭 누가 다녀간 것처럼...”


아이는 어쩌면,

누군가 잊은 마음을

다시 그에게 돌려주는 바람이 된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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