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바릴로체에서 엘 깔라파떼로 이동-2015/05/14(목)
버스는 9시 정각에 바릴로체 터니미널을 출발했다. 근처 마을을 두어 곳 들러 사람을 더 태우는 동안 버스는 굽이굽이 네우껜 주(Neuquen 州)를 돌며 아름다운 가을 풍광을 보여주었다. 마치 떠나는 이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기라도 하듯이.
서른 시간을 달리는 장거리 버스, 게다가 2층 침대버스를 처음 타 보는 게 마냥 신기하고 좋았던 우리는 2층 출입구 옆에 자리를 잡았다. 네우껜 주를 벗어난 버스는 지평선이 보이는 광활한 파따고니아 고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끝없이 펼쳐진 땅은 그저 대지 그 자체로 존재했다. 노는 땅이 없이 논과 밭으로 빼곡하고 자투리땅에는 하다못해 콩과 옥수수라도 심는 우리네 시골 풍경과 비교하니 대륙을 가진 나라의 여유가 부러워진다.
우리가 달리고 있는 이 길은 Ruta 40이라는 이름의 도로이다. 안데스 산맥을 따라 놓인 총길이 5,310 km인 이 도로를 달리는 것만으로도 이 대륙이 가진 아름다움의 절반 이상을 볼 수 있을 만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 길 위에서 하루 세끼를 먹고, 뜨겁게 내리쬐던 해가 지평선 끝에 걸린 산 너머로 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누군가 끝없이 넓은 검은색 벨벳 천위에 작은 보석 알갱이를 무성의하게 흩뿌려 놓은 듯한 밤하늘이 펼쳐졌다. 그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내 몸 위에 엎어져서 꼼지락거리던 제나가 잠들고 어느새 나도 잠이 들었다.
새벽 두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버스 안에 불이 켜졌다.
버스는 Ruta 40의 마지막 종착지 리오가졔고스(Rio Gayegos)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1시간 정도 쉬면서 버스에 연료도 보충하고 내부 청소도 한다며 안내원 총각이 잠에 취한 승객들을 터미널 건물로 내몰았다. 낮에 잠깐 들렀던 휴게소와 달리 리오가졔고스 터미널에는 늦은 시간인데도 사람들로 가득했다.
잠에서 덜 깬 채 아이들과 쉴 곳을 찾아 터미널 안을 어슬렁 거리다가 아르헨티나 남단의 지도를 발견했다. 그 지도를 보고 알게 된 사실인데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국경은 대륙의 남쪽 끝에서 조금 어색하게 나뉘어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국경이 남동부 해안 도시이자 실제적으로 대륙의 땅 끝 마을인 이곳 리오가졔고스에서 급하게 끝나고 마젤란 해협 건너에 위치한 섬 티에라 델 푸에고(Isla Tierra del Fuego)에서는 자를 대고 위에서 아래로 그은 것처럼 반듯하게 나뉘어 있는 것이었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국경 모양이 이런가 싶어서 자료를 찾아보았다.
지금은 티에라 델 푸에고, '불의 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곳은 기원전 10세기경부터 원주민들이 살던 평화로운 섬이었다. 19세기 말, 이 섬에 금광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온 유럽 이주민들은 금광을 소유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원주민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이후 1978년부터 6년간 20여 차례에 걸친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군사충돌이 있었고 그 결과로 지금처럼 칼로 자른 빵처럼 동쪽은 아르헨티나가 서쪽은 칠레가 차지하게 되었다고 하니, 지금의 어색한 국경선은 착취와 분쟁의 역사가 만든 줄 긋기였던 것이다.
지도상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이한 점은 리오가셰고스에서 480 km 거리에 있는 말비나스 섬(Islas Malvinas)이다. 흔히 포클랜드 섬(Is. Falkland)으로 알려져 있는 이 섬은 섬으로부터 13,000 km 떨어진 영국의 해군이 지배하는 영국령이다. 16세기에 스페인이 먼저 발견했다는 주장과 17세기 영국이 먼저 발견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두 나라 모두 지리적으로 멀다는 이유로 관심밖에 있다가 1816년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고 1820년 말비나스 섬에 대한 영유권을 선포하자 영토분쟁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영국은 1832년 자신들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아르헨티나 정착민들을 추방했고 다음 해에 무력으로 점령한 뒤 자국민을 이주시키고 점유권을 주장했다. 이후 영국의 막강한 군사력 때문에 그저 속만 앓고 있던 아르헨티나는 1982년 자국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을 타개하려는 목적으로 말비나스에 군대를 보냈으나 우리가 기억하는 영국의 ‘철의 여인’ 대처 수상이 아르헨티나를 향해 전쟁을 선포하고 군대를 보내 전쟁을 승리로 이끎으로써 영국 해군의 건재함을 전 세계에 과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영국이 이렇게 지구 반 바퀴의 거리에 육박하는 먼 섬에 집착하는 이유는 남극 자원개발의 기지로 삼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크겠다.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우리가 누구의 편에 서야 하는지 판단은 각자의 몫일 것이나, 지금의 세계질서라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 그저 힘의 논리로만 지배되고 있다는 것이 씁쓸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그 섬 말비나스와 함께 떠오르는 이름 하나, 바로 우리 땅 독도다. 말비나스의 아픈 역사를 교훈으로 삼지 않는다면, 이제 부터라도 제대로 정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그 어떤 것도 지켜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공부하자! 그리고 투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