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난생처음 가는 길이었다. 드라마에서도 보지 못했던 길을 걷고 있었다.
우리는 아들을 품고 가야 하는 길로 가느라 좌우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사고 직후 포항에서 했던 첫 수술의 후유증 기미가 보여
아들을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이송해야만 했다.
이송하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를 절체절명 상황이었다.
"어, 환자가 자가 호흡을 합니다."
담당 의사가 했던 그 말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수술 5일 만에 아들은 스스로 호흡했다.
'아, 살았다.'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인공호흡기 없이 아들을 구급차로 옮길 수 있었다.
가는 도중에 위급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는
그대로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섰다.
홍해를 가르듯 구급차는 삐용거리며 서울을 향해 달렸다.
비행기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신촌 세브란스에 도착했다.
"위급한 순간은 넘겼습니다."
담당의사는 우리더러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그날부터 최첨단 의료 시스템으로 치료를 받았다.
2개월 정도 치료를 받았지만 눈에 띄게 좋아지는 건 없었다.
여전히 강직이 심했고 혈압도 높았다.
한 번씩 강직하면 입술을 깨문 후 도무지 입을 벌리지 않았다.
아들 신체 중에서 제일 예뻤던 것이 아랫입술이었는데
아들은 그 입술을 앙다물어서 다 망쳤다.
그러던 어느 날 담당의사가 폭탄선언을 했다.
치료가 끝났다고 했다.
"아니, 인지가 조금도 돌아오지 않았고, 저렇게 혈압이 치솟는 중환자인데 치료가 끝났다고요?"
남편은 의사에게 따지듯 물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치료는 끝났으니 포항 병원으로 되돌아가서
봉합수술을 받으셔야 합니다."
내로라하는 병원이니 치료를 잘해서 집으로 퇴원하라고 할 줄 알았다.
퇴원 오더가 났지만 아들을 포항까지 무사히 옮길 수 있으려나?
간호사가 양손에 주사기를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
일단 혈압을 안정시켜야 퇴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혈압 강하제를 맞아도 아들의 혈압은 200까지 치솟았다.
구급차를 불러 놓은 상태였지만 속수무책으로 기다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의문의 전화가 왔다.
"전국에 있는 모든 학부모들께 연락하여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조심해서 내려오세요. 우리가 포항 병원에서 기다릴게요."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의 전화였다. 알고 봤더니 한동대학교 교수 부인이었다.
우리 아들의 치료를 위해 발 벗고 나선 분이었다.
"삐용, 삐용, 삐용, 삐용"
드디어 아들을 실은 구급차가 시동을 걸었다.
한두 명이 붙들고 옮길 수 있는 환자 상태가 아니었다.
손이란 손은 다 거들어 힘을 보태야만 했다.
늘어질 대로 늘어진 아들을 구급차로 겨우 옮겨 실었다.
최중증 환자를 싣고 먼 길을 가야 하니 의료진을 동행하게 해달라고 병원 측에 부탁했다.
그런데 우리와 동행하게 된 의사는 구급차에 오르자마자 졸기 시작했다.
"피곤하신가 보네요. 급한 일 있으면 깨워드릴 테니 눈 좀 붙이세요."
구급차에 동승한 의사에게 내가 말했다.
구급차 속 바이탈 체크기 혈압 수치는 '133'이라고 찍혔다.
기계가 고장 났나?
구급차에 타자 마자 133으로 표시됐던 혈압 수치는 그대로였다.
그렇게 떨어지지 않았던 혈압이었는데...
함께 구급차에 올랐던 의사는 내내, 눈 한번 뜨지 않아도 됐다.
구급차 속에 있던 우리가 영화배우였다면?
정체 구간을 씽씽 뚫고 지나가는 구급차를 타는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이었다면?
그러나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환자를 싣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달리는 중이었다.
포항 병원에 도착하니 전화하셨던 사모님이 봉투 하나를 우리에게 건넸다.
"이걸로 세숫대야, 욕창 매트, 기저귀, 등등, 우선 필요한 입원물품을 구입하세요."
경황이 없어서 그런 생각도 못했다. '아, 그런 게 필요하지.'
그걸 미리 챙겨주셨던 사모님은 때때로 우리 몰래 병원비를 대납해 놓기도 했다.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도
별처럼 빛을 내는 사람이 있다.
포항병원에서 아들은 두개골 봉합 수술을 받았다.
그 수술 후에 연이어 또 다른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이 험난한 길의 끝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사고 며칠 전, 한 치 앞도 모르고 비싼 돈을 들여 머리 염색을 했던 아들이다.
있는 멋, 없는 멋을 다 냈던 아들이다.
그런데 그는 삭발을 했고 머리에는 붕대가 감겨있고
입술은 깨물어서 다 날아가 버려서 지극히 볼품없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
그의 온몸은 수술로 난도질을 당하고 있었다.
자식 손에 가시만 들어가도 부모맘이 아픈 건데
생때같은 자식을 수술대에 올리는 나날이라니...
뇌압이 차고 있으니 션트를 심어 뇌에 과도하게 찬 뇌척수액을
다른 부위(주로 복강)로 빼내야 한다고 했다.
얼마 지나니 그 병원에서도 치료가 끝났다고 하며 재활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환자는 나아진 것이 없어 보였지만 신경외과적인 치료는 끝났다는 말이었다.
그 병원 근처에 있는 재활 병원으로 전원 했다.
밥을 먹었는지 잠을 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날이 그날 같았다.
그런 삶이 몇 개월째 지나가고 있었다.
일상을 모두 내팽개쳐 두고 포항에 원룸을 얻었다.
우리 부부가 서로 교대하며 간병을 하다가 잠시 쉴 공간이 필요했다.
어느 날이었다. 재활 병원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땅만 보며 걷던 내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어떤 집 담장 너머에 개나리가 활짝 피어있었다.
순간 당황하며 깜짝 놀랐다.
"어머나, 깜짝이야. 봄이 왔네!"
사고 소식을 듣고 포항으로 갔던 순간부터 아들 간병에만 신경 쓰느라 계절도 잊고 살았다.
긴 겨울은 우리도 모르게 끝났고 어김없이 그해도 봄이 왔다.
그런 삶에도 봄은 왔다. 정신줄을 놓고 잠시 개나리를 쳐다봤다.
개나리가 지천이었던 고향의 봄이 생각났고 엄마도 보고 싶었다.
차마 당신의 손주가 사고를 당해 그렇게 됐다는 말을 할 수 없어서
몇 개월간 엄마와 소통하지 못하고 지내고 있었다.
또한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던, 그 이전해 담당했던
학급 학생들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개나리 꽃잎에 그리운 얼굴이 비쳤다.
해야 할 일을 못한 채 던져두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빚진 인생 같았다.
그런 마음을 안고 개나리를 보고 또 봤다.
가던 길 멈추고 서서, 개나리에게 한마디 던졌다.
"반갑다. 찾아와 줘서.
그 추운 겨울을 이기고 예쁘게도 폈네."
P.S.
함께 피운 꽃이 더는 없다 하여도
내가 여기 남아 홀로 기억하겠소
환하게 일어나는 반딧불처럼
그리움에 되살려 보네 ( 안예은의 '만개화'가사 중에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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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