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황석영 작가 <할매>
소설은, 시작하는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 사이를 메꾸어 가는 작업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였고 끝 문장은, "이놈아, 어디 갔다 인제 오냐"였다. 작가는 이 두 문장 틈새를 4년 여 동안 채워나갔다. 600년의 서사를 두 문장 사이에 치밀하게 메꾸었다. 마땅히 대하소설 분량일 듯하나 달랑 한 권으로 끝났다. 그러므로 '숏폼' 대하소설이란 생각이 들었다. 또한 작가는 소설 <할매>를 집필하면서 AI를 '조수'로 활용했다고 밝혔다.
책 읽기를 시작하면서부터 숨이 콱 막혔다. 작가가 소설의 배경을 그려나가는 펜 끝이 너무나 섬세하고 예리했다. 아주 가늘고 뾰족한 붓으로 틈새까지 놓치지 않고 깨알같이 그리는 그림 같았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려고 물감을 사용한다면, 황석영 작가는 한평생 모아두었던 어휘 주머니에서 각고조탁한 단어와 표현을 가져와 글을 빚었다.
하지만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워 두서너 번 읽기를 포기하려고 했다. 이야기 고개가 그야말로 꼬부랑길 같았다.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재미가 있어야 글을 읽게 되는 법인데 하품만 나왔다. 사람이 없는 황량한 벌판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염없이 읽고 있자니 등장인물이 도대체 언제 나올까 궁금했다.
알고 봤더니 사람이 등장하기를 기다리며 읽을 소설이 아니었다. 전지적 '나무' 시점이었다. 팽나무가 바라본 증언이었다. 그 팽나무의 이름이 '할매'였다. 이 책을 읽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투박하지만 정겨운 말투를 지녔던 할머니가 그리워서 집어 들었다. 아쉽게도 그런 할머니는 등장하지 않은 <할매>였다. 아무래도 책을 잘못 고른 것 같았다.
궁여지책으로 발단 부분을 필사해 보기로 했다. 그랬더니 뜻을 음미할 수 있었다. 꾸역꾸역 책을 끝까지 읽고 나니 마침내 작가의 창작 의도를 알 수 있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수놓듯 어휘를 챙겨 와서 문장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단어 하나도 허투루 쓰인 게 없었다. 구체적이고 정교한 소설 배경에 등장하는 새와 꽃과 나무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일종의 다큐멘터리를 글로 표현했음직한 압도적인 서사였다. 지극히 사실적이어서 소설이라는 생각을 접어두게 했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랬다. 팽나무 열매를 먹은 새가 갯벌에 와서 죽었고, 거기서 싹이 돋았다. 수도승 몽각, 그 자손 당골네, 그 자식이 자식을 낳고, 또 낳고 낳는다. 병인박해나 동학 혁명 등으로 인간의 생명이 먼지처럼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다. 마을에서 일어난 모든 인간사와 일제 강점기, 미군 기지 확장 등 많은 역사를 묵묵히 견뎌낸 팽나무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팽나무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 그의 나이테 속에는 수없이 죽었다가 살기를 반복하며 바람에 나부끼면서 저장해 둔 기록이 있다. 인간 문명 중심에서 벗어나 나무의 시점에서 역사의 흐름을 바라본다.
작가는 팽나무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노력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도모하려고 애를 썼다. 팽나무를 통해 문명과 자연의 하모니를 생각하게 했다. 여느 소설처럼 인물 간의 갈등을 그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군산에 이사 오자마자 하제 마을 빈터를 찾아가 막걸리 네 병을 나무뿌리에 부어드리고 축문을 지어 소지하며 지켜드릴 것을 서원했다. 그 서원 안에는 팽나무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한 편 쓰겠다는 염원도 들어 있었다. -219p
작가는 팽나무를 둘러싼 600년은 역사가 아니라 인연과 관계의 순환이며 카르마(업보)의 계속되는 전이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책을 다 읽은 후에 다시 팽나무가 처음 새싹이 돋았던 장면을 읽으니 가슴 저 밑바닥에서 뜨거운 감정이 솟구쳤다.
개똥지빠귀는 숨이 끊어졌다(...) 개똥지빠귀의 배 속에 팽나무 열매 몇 개가 있었다. 열매의 거죽은 새의 시신과 함께 곧 사라졌지만, 딱딱한 굳은 씨앗은 부드러운 모래흙으로 들어가 스며드는 물기와 더불어 차츰 땅속으로 묻혔다(...) 그것은 지난해 이른 봄, 땅에 떨어지던 때와 같은 무렵이 되어서야 굳은 겉껍질이 오랫동안의 습기에 불고 금이 가면서 싹이 트고 실 같은 뿌리가 생겼다. (...) -31~32p
이 장면은 감동을 넘어선 감격이었다. 대작가가 쓴 소설의 무게가 느껴졌다. 앞으로는 <할매>를 읽었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으로 통할 것 같다. 마음속에 잔잔한 물결이 일어나게 해 준 소설이다. 속 울음을 삼키게 했다.
장엄한 이야기의 여운은
오래도록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06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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