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을 지내면서 나는 바야흐로 택배 마니아가 되어버렸다. 시도 때도 없이 택배가 당도한다. 코로나 이후부터는 대형마트에 아예 발을 끊었다.
아들이 중증 장애를 입고 장기 재택 치료 중이라 남달리 택배로 주문할 것이 많다. 게다가 세컨드 하우스, 교회로도 시켜야 하는 물품의 가짓수도 만만치 않다. 그토록 많은 주문을 했는데도 아직까지 택배 물품을 못 받거나 잘못되는배달 사고는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옆 동 라인의 같은 호수에 사는 분이 주문한 물품이 우리 집 문 앞에 배달되어 있었다. 옆 동에다 그것을 놓아두었다. 우리가 배달을 하도 많이 시켜서 아마도 배달원들이 착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며칠 후에,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이거 뭐지? 시킨 적도 없는데...
전송장 라벨은 확인해보지도 않고 택배 박스를 풀어보니 우리가 주문한 적이 없는 여러 가지 생활용품이 있었다. 확인해보니 옆 동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 박스를 들고 배달해줄 수 있는 무게가 아니어서 해당 쇼핑몰 고객 센터에 연락을 했다. 통화가 거의 끝날 즈음에 상담원이 말했다.
그거 그냥 폐기해주세요.
이거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우리가 왜 그걸 처리해야 되죠?
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고객센터 상담원에게 말했다.
아, 정 그러시다면 저희가 수거 처리로 접수해 둘게요. 밖에다 내놓으세요.
전화를 끊고 나니, 옆에 있던 남편이,
이거 '폐기하라'는 말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챙기고 나머지는 없애라는 말인 듯하네.
그런가? 그러면 대체적으로 가정용품이니 그냥 두고 쓰죠, 뭐.
다시 고객 센터에 연락을 했다. 우리가 폐기 처분을 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에 이미 '수거 처리 신청'을 했다고 한다. 번거로우실 테니 우리가 폐기하겠다고 했더니 더 이상 번복할 수는 없다고 했다. 폐기 신청-> 수거 신청은 가능하지만, 수거 신청-> 폐기 신청으로는 안된다는 희한한 원칙을 말했다. 그 물품들을 다시 박스에 담아서 집 문 앞에 내다 놓았다. 택배 문화가 만연하다 보니 생겨난 또 다른 폐해였다.
그런데 며칠 전에 퇴근하니, 문 앞에 수박 한 개와 세탁 세제가 있었다. 이것은 택배 상품이 아니었다. 수박에 마트 명이 적힌 가격표 라벨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마트에서 온 듯했다.
누구지? 누가 놓고 갔지?
일전에 한 지인이 망고를 집 앞에 두고 간 후에, 맛있게 먹으라는 문자를 보내온 적이 있다. 추석을 앞두고 그 지인이 또 가져다 둔 것인가? 별의별 생각을 다 해봐도 누가 두고 간 것인지 알 길이 막막했다.
밤새 그곳에 수박을 두면 상할 것이고 몇 날 며칠을 내 몰라라 하며 문 앞에 둘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출처를 모르는 수박을 일단 집안으로 들고 들어왔다. 라벨지를 따로 챙겨놓았다. 잘못 배달된 것이면 수박값을 돌려주는 방법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박은 외관부터 맘에 들지 않았다. 꼭지는 바짝 잘려 있는 데다 아예 시들어 말라 있었다. 수박 속은 과연 어떨까? 큰 칼로 맘 졸이며 수박을 잘랐다. 어라, 생각보다 속은 나쁘지 않았다. 먹을 만했다. 그러나 그 맛이 참 어정쩡했다. 출처를 모르니....
올해는 긴 장마 때문인지 택배로 배송시킨 수박은 늘 실패였다. 기획 상품이라며 대놓고 광고하는 수박인데도, 속은 은근슬쩍 농해 있었다. 그런데 수박 꼭지는 당일에 딴 것처럼 싱싱했고 외관도 초록색, 검정 색깔이 선명했다. 수박 속은 빨갛게 먹음직스러워 보이지만 단맛 나는 주사(어디선가 들을 적이 있는 것 같다.)를 준 것 같은 것도 있었다. 몇 번의 실패를 반복하다가 할 수 없이 단골 과일가게에서 배달시키기로 했다. 그곳의 수박은 잘라보지 않아도 맛을 보장할 정도다. 수박 하나를 달랑 배달해달라는 말을 하기가 뭣해서 택배를 이용해왔던 것이다. 미안한 맘에, 한 번에 2개씩 시켰다. 수박 두 덩이를 시키면 껍질로 내버리는 음식물 쓰레기도 만만치 않고 냉장실을 수박이 다 차지했다. 남편은 하루 세끼 수박을 먹어댔다. 2개를 한꺼번에 시킨 수박을 빠른 시일 내에 먹는 방법이었다.
다시 이야기를, 잘못 배달된 수박으로 넘겨본다.
며칠 후에 시끄럽게 초인종이 울렸다.
수박 주세요.
다짜고짜 수박을 내놓으란다. 마치 맡겨놓은 사람 같다.
아, 그 수박 말씀인가요? 저희 문 앞에 수박이 배달되어서 어찌할 방도가 없어서 일단 저희가 잘라서 먹고 있어요. 맛은 별로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수박값을 준비해두었으니 다시 사서 드셔야겠네요.
나는 현관문에 부착해둔 가격 라벨지를 보여드리며 말했다. 그리고 함께 놓여있던 세제도 드렸다.
그냥 20,000원 드려.
또 남편은 저런다. 쓸데없는 데까지 '착한 아이 증후군'이다. 그건 아닌 듯했다. 공은 공, 사는 사.
하여간 거스럼 돈 2,000원을 돌려받았다. 그분은 죄송하다거나 고맙다는 말도 없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나는 뭔가 당한 기분인데.... 계산은 정확한 것 같은데 난데없이 뺨을 얻어맞은 기분이 슬쩍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