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a향기와찬양Lim Aug 27. 2022

치약에서 민트향이 나지 않았다

- 건망 일지

[좌: 폰 클렌징크림 / 우: 크리스털 민트 치약]

   건망증 때문에 불편을 겪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나의 경우는, 하는 일이 워낙 여러 가지인 데다가 약간의 건망증이 있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는 편이다. 나의 캘린더에는 해야 할 일들이 빼곡히 적혀있다. 한 일은 삭제하고 완료하지 못한 일은 그다음 날로 옮겨서 저장하며 생활하고 있다. 아침에는 할 일을 미리 읽어보고 밤에는 그 캘린더를 정리한 후에 잠자리에 들곤 한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할 일을 잊어버려서 낭패를 당하는 적은 거의 없었다. 일정에 대한 시간까지 세팅해두니 그 시간이 되면 알람이 뜬다. 참 편리하다.

   특히 학교 생활에서는, 교실 수업 일지를 만들어서 그다음 시간에 발표할 순서인 학생의 이름을 적어놓고 수업 진도 상황도 꼼꼼하게 적어둔다. 그러면 난감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자행했던 몇 가지 썰을 풀어보고자 한다. 웃픈 사연들이다.


    어제저녁에, 귀가하여 양치를 시작하는데 묘한 기분을 느꼈다. 치약에서 민트향이 나지 않았다. 치약이 상했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얼른 거품을 뱉었다. 약간 미끄덩하기도 하고 기분이 찜찜했다. 세면기 위에 있는 선반을 쳐다보았다.

    언젠가 한 번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요.

    치약과 폰 클렌징크림이 나란히 서서 나를 꼬나보고 있었다.

    주인님 허둥대다가 우리를 혼동하여 치약으로 세수하고 폰 클렌징크림으로 이 닦을 줄 알았어요.

    에구, 이게 웬 망신이람. 

   그것들이 기고만장하여 나를 업신여기고 있는 듯했다. 당장 두 개 사이에 다른 물건들을 정렬하고 거리를 띄웠다. 그래도 또 착각하려나? 아이고 두야! 흑흑흑.


    얼마 전에도 난감한 일이 있었다. 소변을 본 후에 비데를 사용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일어서는데 물총이 나를 향하여 쏘아대고 있었다. 정지 버튼을 누르지 않고 일어난 것이다. 옷이 젖고 기분은 더 젖었다.

   우리 주인님, 그렇게 하는 날이 올 줄 알았어요. 좌변기에 앉으면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으신지? 저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으시더니, 쯧쯧, 쌤통이네요. 시원하시죠?

비데가 비아냥거린다. 저것을 그냥, 콱!

에구, 인간인 내가 한낱 비데랑 말다툼하겠냐? 나잇살이나 먹었으니 참아야지.


    또 생각나는 일이 있다. 뭘 제대로 못 봐서 생긴 일이다. 평생 안경잡이로 살다가 라섹을 한 지 6년 정도 지났다. 라섹을 해서 안경을 끼지 않고 일상생활에는 불편 없이 살지만 책을 보거나 컴퓨터, 스마트폰 등을 사용할 때는 누진 다초점 안경을 낀다. 노안의 진행 속도가 라섹을 이기고 있다는 증명이다.

   싱크대에 까만 벌레가 하나 붙어있었다. 콩벌레인가? 아닌데? 색깔이 유난히 검은데? 얼른 파리채를 가지러 갔다. 맘이 급할 때는 그런 것 어디에 있는지 금방 생각이 나지 않고 머릿속이 까매질 때가 있다. 현관 신발장에 걸어 둔 파리채를 가져와서 그 벌레가 한방에 죽을 수 있게 힘 있게 때렸다.

   벌레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꿈쩍도 않는다. 한방에 죽어버린 모양이었다. 화장지로 치우려는데 참 많이 봤던 모양이 눈에 들어온다. 수박씨였다.

   주인님, 너무해. 평소에 모기나 파리를 잡을 때는 그것들이 기절할 정도로만 살짝 때려잡더니 이번에는 저를 유독 세게 때렸어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수박씨 터질 뻔했네요. 정신 좀 차리세요.

   수박씨한테도 잔소리를 들었다. 기가 막힌다.


    이게 마지막 썰이라는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한다. 언가 이를 닦는데 분명히 짜놓은 치약이 칫솔에 없었다. 칫솔 등에다 한가득 짜 놓았던 것이다. 오물오물하여 치약을 이가 있는 쪽으로 옮겨서 이 닦기는 끝냈지만 입안도 마음도 개운치 않은 날이었다.

주인님, 칫솔 모와 칫솔 등짝도 안 보고 치약을 짜시는 겁니까? 도대체 정신을 어디에 두고 사시나요? 담에도 그러시면 우리 치약과 칫솔은 연대 파업을 할 계획입니다.

너네가 파업을 해봤자 뭘 하겠다는 거야?

아예 주인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릴 작정입니다.

너네가 무슨 수로?

주인님이 정신없으면 아무것도 뵈는 것이 없어질 테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들을~ 콱!


[일부 사진:픽사 베이]


이전 22화 올여름, 마지막 수박 맛?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