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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찬양Lim Feb 11. 2022

출구 없던 봄

   - 미발령 교사가 되다


 그해 2월에는, ‘가장 어정쩡한 달, 2월’이라는 시 구절이 내게 확 들어왔다.
 

   교대를 졸업하고 2년 먼저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이 나 있던 S와 O에게 가서 그 칙칙한 2월의 시간 전체를 닳아 없애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래도 2월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남해 미조의 새벽 배는 몹시도 부지런하여 밤새 잠 못 이룬 나를 방해하고 있었다. 그나마 찬란한 해돋이는 그 맘을 조금이나마 위로했다. 밤새 불었던 해풍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고열에 시달리게 되었고 동네에서 쉽게 부를 수 있던 돌팔이 의사가 와서 아픈 주사를 한 방 놔주고 말없이 가버렸다. 그 이후로 얼마나 더 아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40년 전의 일이지 않은가? 2월이 오면 지금도 가시지 않은 트라우마를 느낀다.    

몸과 맘이 아팠던 곳, 남해 미조항
하늘이 갈라놓지 않으면 영원할 것 같았고, 남다른 플라토닉 러브를 한다며 욕정을 죽여가며 사랑을 엮어왔던 그가 떠났다.

   그해 2월에, 내 가치가 확 떨어진다고 여겼으리라. 사랑 속에는 때로 가치를 저울질한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좋으면 그만이라고만 여겼던 나는 한 방 맞았다. 우린 사소한 것에도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나는 눈치챌 수 있었다. 적어도 그에게 나는 가치가 떨어진 사람이라는 걸, 그런 사랑은 진정한 사랑일 수 없다. 그런 자는 차 버려야 한다. 나는 그가 나를 떠나도록 비상하게 조종했다. 그러자 내가 던진 낚시에 걸려들 듯이 그가 눈치 없이 떠났다. 나는 욕을 바가지로 퍼주어 주며 그와 헤어졌다. 그곳은, 설탕 둘, 프리마 둘이라고 하며 커피를 주문하고 수많은 연인이 눈물을 닦아내며 이별하던 한낱 다방이 아니었다. 그 시절에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며 우리 삶에 들어왔던 모카, 수프레모, 카푸치노 등 다양한 커피 향이 섞여 있던 카페에서였다.    

안녕은 영원했다

 

 국립 사범대학 졸업을 앞둔 2월에야 앞길이 캄캄한 것을 알았다.
 

   인터넷이 지금 같이 원활하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천천히 들려온 소식은 기가 막혔다. 앞을 내다보지 않고 교원만 양성하여 나갈 곳이 없으니 일단 동굴 속에 갇혀있으라는 메시지 같은 것이었다. ‘불어’ 교사는 적체될 수밖에 없어서 언제 발령을 내줄지 기약이 없으니 무한정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린 그냥 멈춰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어나 영어에 소질이 없지도 않았건만 샹송이 좋아서 불어교육과로 진로를 결정한 것이 내 인생의 크나큰 걸림돌이 될 줄을 미처 몰랐다.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공무원 임용 절차’를 거쳐 나는 버젓이 교육청 교원임용 후보 명부에 이름이 올라있었다.   

  

사범대학(teacher's college, 師範大學)은 사범대학 재학 중에는 장학금을 주고, 졸업을 하면 2급 정 교사자격증을 주어 국립 사범대학 졸업생의 경우는 국가가 교사 발령을 해주고 졸업생은 복무 의무가 있었으나, 1980년대 후반에 사립 사범대학 측이 이것은 기회균등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는 헌법소원을  제기하여 받아들여짐으로써 국립사범대 학생들의 의무복무 및 자동 발령제가 폐지되고 교원임용은 교원  임용고사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는 졸업 뒤에 바로 발령을 받지 못했지만, 교대를 졸업했거나 국어나 영어를 전공했던 친구들처럼 머지않아 곧 교단에 설 것으로 철석같이 믿었다. 교육공무원법(제11조 1항)에서 국공립 사범대 졸업자를 우선 임용하도록 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예비교사’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대한민국 문교부는 미발령교사들을 구제하기 위한 유예기간 없이 곧바로 새 임용제도(임용고사)를 시행해버렸다.   

  그즈음에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아버지 자리를 내가 대신해야만 했다. 금의환향은 아니더라고 그런 모습으로 귀향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어머니가 받은 충격을 누구보다 나는 잘 알 수 있었다. 죄인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미발령으로, 나는 불효녀일 뿐 아니라 죄인이 되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아 가면서 딸내미 대학을 졸업시켜놓으면 그것 보라 하며 큰소리칠 수 있을 것으로 믿으며 나의 뒷바라지를 하셨던 어머니였다.

   “나라가 하는 일이니 언젠가는 발령이 날끼다. 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맘을 크게 묵어라. 아마 환갑 전에는 날 거야.”

   어머니는 나를 위로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스스로 위로하며 맘을 다잡고 계신 듯했다.

   그 답답하고 춥기만 하던 2월이 끝이 났다. 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떠나셨고 꼼짝없이 나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엄마를 도와야만 했다. 발령이 나서 교사가 되는 것은 깡그리 잊고 지냈다. 신발을 팔거나 신문을 배달하고 리어카를 끌고 연탄 배달을 하며, 배운 지식인이 시골 촌구석에서 일독에 빠져 살았다. 사랑은 떠났고 친했던 친구들도 발령이 나서 가버려서 내게 남은 건 몇 톤도 넘는 일거리들과 어머니의 숨비소리 같은 잦은 한숨 소리뿐이었다.   

일독에 빠져 지냈던 고향, 야로 장터
 출구 없는 나의 아픈 봄이었다.
 

   그때, 국어과로 발령을 받은 절친 P가 외롭다며 한 번 다녀가라는 연락을 해왔다. 외로움보다 서러움이 더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친구 P는 알 턱이 없었으리라. 친구의 발령지 악양의 봄은 참 아름다웠다. 박경리 작가가 쓴 ‘토지’의 배경인 악양의 고즈넉한 아름다움보다도 먼저 발령을 받아서 벚꽃 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출근하는 친구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핑크빛  브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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