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그때는 신문으로 주요 뉴스를 찬찬히 읽어서 알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딱히 궁금한 뉴스도 없는데 ‘K일보’ 신문이 계속 들어왔다. ‘신문 사절’이라고 문간에 부치기도 했다. 몇 개월을 무료로 넣어준다고 앙탈을 부렸다. 그날도 뾰로통한 맘으로 무심코 신문을 집어 들었다.
국립師大 미발령 교사 구제
1990년 이전 국립사대 졸업자 가운데 교사로 임용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이 제한 없이
중등교원 임용시험을 치르거나 교대에 편입한 뒤 초등교사로 임용되는 길이 열린다.
아주 짧은 기사였지만 나와 아주 연관이 깊은 뉴스였다.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졸업하고 발령이 나지 않아서 기가 막혔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의무 발령이라는 국가의 약속은 헌신짝처럼 던져졌었다.
◇ 뒤안길
그 이후에 4년간 고향에서 일순이처럼 열심히 집안일을 돕다가 결혼을 했다. 전업주부로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학교 교사 쪽으로는 눈을 돌려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이 좀 자라면서 어린이 영어 공부방을 10년 넘게 운영해오고 있던 터였다. 전형적이고 획일적인 영어 교육방식이 아니라 원어민이 출강을 와주고 비디오를 활용한 입체적인 영어교육이어서 학부모들이 앞다투어 나의 공부방으로 밀려와 자녀들을 맡겼다. 나는 잘 나가는 공부방 영어 선생이었다.
◇ 슬슬 시작되는 발걸음
신문 기사를 꼼꼼하게 읽은 후에 교육청으로 연락을 하여 그곳에서 안내하는 대로 일을 추진해나갔다. 국어나 영어를 전공했던 친구들은 이미 벌써 교사가 되어 20년 이상 근무하고 있을 때였지만 예비 교사들을 잘 연수시켜서 마침내 발령을 내주려는 것으로 알았다.
뒤늦게 알고 보니, 미발령 교사들이 수도 없이 투쟁하며 교사로 채용해주라고 요구해 왔다고 했다. 나는 딴 세계의 사람 같았다. 그날의 신문 한 귀퉁이를 읽지 않았다면 지금도 아마 그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미발령교사들의 투쟁
국립사대 졸업자들은 90년 10월 7일 이전에는 교원임용시험을 치르지 않고 공립학교 교사로 우선 임용됐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8일 우선 임용 규정이 위헌이라는 결정이 내려져 발령을 받지 못하는 교사들이 생겼다. 이들은 "졸업 후 교사 임용을 보장받고 사범대에 입학한 것"이라며 무조건 교사로 채용해주라고 요구해 왔다. [2004.01.12. 중앙일보에서 발췌]
미발령 교사들은 자신이 전공했던 과목의 티오가 없어서 적체되어 있었다. 국어, 영어, 수학 과목 중에서 하는 과목을 선택하여 부전공 연수를 받은 후에 발령을 낸다는 것이었다. '불어'를 전공했던 나는, 10년 넘게 영어 공부방을 운영해오던 터라 영어를 부전공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국립대학 몇 군데서 연수가 시행되었고 ‘영어’ 과목은 순천대학교에서였다.
◇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순천
인천에서 순천은 멀다면 참 먼 거리다. 버스로 4~5시간 걸리는 거리다. 처음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되는 그해 오월, 하늘을 뚫어버리고 세상을 쓸어 엎을 듯한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달리는 고속버스가 금방이라도 불탈 것같이 번개가 번쩍거렸다. 내가 가는 길을 축복하는 것인지 질투하는 것인지 천둥은 왜 그렇게 쳐댔는지 모를 일이다.
전국 각지에서 영어를 부전공하겠다고 많은 미발령 교사들이 몰려왔었다. 제주도에서는 물론 외국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커다란 이민용 여행 캐리어 같은 것을 끌고 당일에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사람이 초주검 될 정도의 힘든 과정이라고 예견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온종일 머리에 쥐가 나도록 음성학, 음운론, 영시, 영미 문화, 영문법 등등 영어학의 대부분을 수강하고 매주 시험을 보고 발표해야 하는 일정이었다.
강의가 끝나는 금요일에는 막차 버스를 타고 인천으로 왔다가 가정을 돌아보고 일요일 저녁에 다시 지친 몸으로 막차를 타고 순천으로 가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매주 월요일에는 빈 B4 용지를 몇 장을 받아 들고 보는 시험이 꼭 있었다. 준비시간이 부족했던 나는 버스 천장의 흐릿한 조명 아래서 시험공부를 했다. 피곤은 한시도 풀릴 시간이 없었고 생지옥 같았다. 연수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나는 알았다. 연수가 끝나면 영어 전공 임용고사를 봐야 하고 무엇보다도 교육학 시험과 논술 준비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쯤 되니 당일에 연수를 포기하고 되돌아간 사람들이 참 현명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중간에 떠난 자들의 심정도 이해가 됐다. 그러나 나의 성향은 한번 시작한 일은 반드시 끝까지 해내는 편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불가마 같았던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본다. 나는 이미 루비콘강을 건넜다. 6개월 연수만 하고 넘을 산이 높다고 그 자리에서 포기하고 주저앉을 내가 아니었다.
연수를 끝내고 집이 있는 인천으로 올라와서 노량진 학원을 등록하여 매일 수강하러 다녔으나 맘은 너무 다급했다. 그때부터는 밥만 먹고 온종일 시험 준비만 했다. 교육학은 완전 독학으로 해냈다. 두꺼운 교육학 책을 부분별로 뜯어서 제본하여 공부했다. 뒷부분을 하면 앞부분은 잊어버렸다. 매일 혼자서 모의고사를 봤다. 영어 전공은 물론 영어 인터뷰 및 논술을 준비하기도 해야 했다. 죽은 송장도 일손을 돕는다는 공부의 농번기와 같았다. 드디어 교원 임용고사를 봤고 나는 운도 좋게 꼴찌로 합격했다. 공부 잘한다고 박수는 많이 받아봤으나 꼴찌는 처음이었다. 꼴찌로 이해하는 사람으로 다듬어지고 있었다. 교원임용고사 통과로 내 인생은 전환점을 맞았고 그 이후에 다시는 순천에 가지 않았다. 이쯤 되니 순천의 마른하늘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