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아들이 좋아요?
딸이 좋아요?
내가 태어나던 날, 어머니는 딸을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할머니께 괄시를 받으셨다. 위로 오빠가 있었는데도 그랬다. 아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여기던 때였다. 할머니는 산모에게 애썼다는 말 대신에 가마솥뚜껑을 시끄럽게 여닫으며 큰 소리로 역정을 내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 등쌀에 몸조리는커녕 출산 당일에 곧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안일이며 농사일을 하셨다고 한다.
"변변찮은 가시나가 태어나 가지고..." 할머니는 손자가 많아야 사람들이 업신여기지 않는다고 믿으셨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손자를 대여섯 명 정도 얻고 싶으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그런 할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줄줄이 딸을 넷이나 낳았다. 그래서 할머니가 부당하게 잔소리를 해도 아들을 겨우 하나 밖에 낳지 못하여 어머니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셨단다.
우리 집 넷째 딸의 이름은 '정렬'이었다. 그 시절의 이름치고 참 세련된 이름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아마 얼굴도 예뻤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 동생의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예닐곱 살 때였을 것 같다. 정렬이는 아마 돌을 갓 지냈을 것이고... 그 어린 아기가 무슨 큰 병이 걸렸던 모양이다. 어머니가 장터에 있는 '쾌생 의원'으로 아기를 업고 몇 번인가 달려가곤 하셨다.
어느 날, 어머니는 병원에서 업고 온 아기를 안방에 내려놓으며 말씀하셨다.
"죽은 거 같다. 얼라가 숨을 안 쉬네."
죽음이라는 단어가 차갑게 들렸다. 아무도 죽음이란 것에 대해 내게 설명해 준 적도 없었는데도 어머니의 그 말에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그리고 무서웠다. 죽으면 일단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을 어린 내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안방에 눕혀둔 아기에게 다가가서 내 얼굴을 대보았다.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나 혼자 그 아기의 얼굴에 내 얼굴을 비볐다. 그게 마지막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목청껏 울어주었을 텐데... 그날 어느 누구도 울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세상을 떠났는데 왜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그것은 네 번째 '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넷째 동생이 우리 곁을 떠났으나 일상은 여전했다. 한 생명의 오고 가는 일이 그저 사소한 일상이었다는 것은 늘 내 맘에 죄책감으로 남아 있다. 그 뒤로 막둥이 남동생이 태어났다. 집안은 잔치 분위기였다. 그날부터 어머니의 기세가 등등해졌다.
"이제 내가 아들을 둘이나 낳았는데 기죽을 거 뭐 있노?"
어머니는 남동생이 태어난 날 이후로 확 달라졌다. 할 말은 하고 살겠다는 자세였다. 그 이후로 어머니는 할머니께도 큰 소리로 대드셨다. 아버지께도 고분고분하지만은 않았다. 막둥이 남동생은 어머니에게 신나는 깃발이었다. 남동생이 태어난 이후로 변한 것은 어머니뿐만 아니었다. 아버지도 딴 사람 같았다. 우리에게는 나치 독일 장교같이 무섭고 깐깐했던 아버지였지만 남동생만 보면 콧노래를 흥얼거리셨다.
"우리 똥강아지, 어디 한 번 안아볼까? 우리 개찬이, 개찬이~"
'개찬이'가 무슨 뜻이었을까? 아버지는 남동생을 안아 줄 때 항상 개찬이라고 불렀다. 아버지가 만든 남동생의 애칭이었다. 남동생만 보면 입꼬리가 올라가던 그분이 그 무섭기만 하던 우리 아버지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때때로 남동생이 속을 썩일 때도 있었다. 우리 맘에 들지 않을 때도 종종 있었다. 그래도 우리 아버지가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자식이라 생각하면 동생에게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오빠와 남동생은 아버지의 깃발이었다. 그렇다면 딸 셋은 아버지에게 무엇이었을까?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어쩌다 넷째 동생의 얘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얼라가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축 늘어지길래 '이거 잘못됐구나.' 했지. 지금 생각하면 잘 죽었다 싶다. 이 많은 자식들 키우느라 내가 등골이 휘었는데 그것까지 있었더라면..."
도대체 어머니는 어떻게 저런 말을 하실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자식을 생각하며 우셔야 하는 건데?
'남존여비' 사상은 참 무서운 것 같다.
그런 가정에서 자란 나도 그 사상이 배어 있었다.
결혼 후 나는 첫 아이를 낳았다. 그 당시에는 미리 태아의 성별을 알지는 못했다. 낳고 보니 딸이었다. 그 순간 0.001초 동안 서운했다. 딸이라는 그 이유 만으로... 아기 얼굴을 보지도 않았는데 그냥 마음이 그랬다. 나는 나주 임 씨 장수공파 17대 장손 맏며느리였다. 그래서 일단 첫 아이는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시부모님은 출산 소식을 듣고 완행버스를 타고 한 걸음에 오셨다. 딸이라서 서운한 맘을 잠시라도 가졌던 나와 달리 시부모님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맏며느리가 떡두꺼비 같은 첫아들을 낳아야 가문에 빛이 나지.' 나는 시부모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였다.
"죄송해요. 맏며느리라 아들을 낳았어야 했는데..."
"그런 말이 어디 있다냐? 그런 말 마라. 아가, 아가!" 시부모님은 추호도 섭섭한 생각을 하지 않으시고 손녀를 보고 사랑에 겨워하셨다.
'이상하네. 이 분들은 어떻게 이런 맘을 가질 수 있지? 남존여비 사상을 귀하게 여기는 양반 가문이 맞나?' 시부모님들의 그런 반응이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편도 딸이란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냥 아이를 쳐다보며 싱글거렸다.
내가 딴 세상에 와 있는 것인가? 이게 아닌데? 어느 가정이든 아들은 있어야 그 그 집안이 힘이 있는 법인데... 내 어머니처럼 줄줄이 딸만 낳으면 어쩌지? 딸은 엄마를 닮는다는 말이 있던데...
그날부터 나는 걱정이 하나 생겼다. 또 딸을 낳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밀려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