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때부터 아침에 눈을 뜨면 먼저 하는 일이 있다. 바로 '건강상태 자가 진단 앱'을 여는 일이다. 1번 문항은 코로나 의심 증상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체온을 재야 한다. 37.5도 이상의 고열이 있다면 일단 '일상 멈춤'을 해야 했다.
내가 아침마다 사용하는 디지털 체온계는 오래전에 사용했던 막대형에 비하면 간지 난다. 코로나 이후에 대부분의 가정이 디지털 체온계를 한 두 개쯤 가지고 있을 것이다. 값도 예전만큼 비싸지 않다. 비접촉 적외선 측정방식인 '이마 체온계'를 사용할 때마다 오래전에 있었던 체온계에 얽힌 일이 떠오르곤 한다.
허니문 베이비로 첫 딸을 낳은 후에 둘째를 가지기 위해서 소위 가족계획을 세웠다.
"연년생은 안 돼요. 그러면 큰 애가 동생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더라고요."
"그러면 세 살 정도로 터울을 둘까?"
"그게 좋겠어요."
여기까지는 순조롭게 남편과 의논이 됐다.
"그런데 우리는 딱 2명밖에 낳을 수 없어."
"왜요?"
"공무원은 2명까지만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야." (그때 남편은 국가직 공무원이었다.)
"어, 그러면 둘째는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되겠네... 어떻게 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을까?"
우리는 아이를 두 명만 낳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더욱 둘째는 아들이어야만 했다.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딸 낳은 다음에 아들을 낳으면 200점이라고 하잖아? " 남편이 말했다.
그랬다. 그때는 그런 말이 었었다. 1980년대는 한 자녀만 낳기를 권장했다. '한 집 건너 한 명'이라는 말도 나돌았다. 심지어 예비군 훈련장에서는 즉석에서 정관 수술을 하면 훈련을 면제해주기까지 했다.
[당시 출생 성비 불균형은 매우 심각했고 남아 출생 성비는 1990년 116.5까지 올랐다. 출처: KDI 경제정보센터]
정부의 산아제한으로 남아선호 사상은 더 심해졌다. 그래서 그때 아들 외동이 참 많았다. 첫 아이가 아들이면 둘째를 가지지 않는 것이 대세였다. 그러다 보니 한 때는 남아 출생이 급증했다.
가족계획을 세운 그날부터 우리 부부는 출산에 관련된 책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인터넷이 상용화되지 않았다. 요즘처럼 검색하면 쉽게 자료를 제공하는 '지식인'이 없었다. '챗GPT'는 물론 없었고...줄창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둘째 아이는 반드시 아들을 낳아 보겠다고 우리가 했던 일이 있다. 배란일을 알기 위해서 매일 아침에 기초체온을 재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체질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 부부는 식습관을 바꾸었다.
나는 아침마다 잠에서 깨면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일단 체온을 쟀다. 그래야 기초체온을 체크할 수 있었다. 매일 체온을 체크하여 꺾은선 그래프를 그려 나갔다. 배란일 직전에는 기초 체온이 약간 내려간단다.
나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야릇한 금속성과 유리재질 느낌이 나는 막대형 체온계를 물고 있었다. 체온계 속에 사용된 것은 수은이었다. 그 위험천만한 것을 아침마다 물고 있었다니 지금 돌아보니 한심하다. 그러나 그만큼 아들을 꼭 가져야겠다는 마음이 절실했던 것 같다.
내가 늦잠이 들어서 미처 깨지 못하고 있으면 남편이 내 입속에다 그 체온계를 집어넣어 놓곤 했다. 혹시 내가 잠결에 그 체온계를 이로 깨물기라도 했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아침마다 체온 재는 일 외에, 나는 주로 야채 위주로 식사를 했고, 남편은 부지런히 고기를 먹었다. 아들을 낳는 비법을 어디서 주워 들으면 나름 실행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두서너 달 정도 아침에 체온 재는 일을 계속했다.
"아, 몰라 몰라. 더 이상은 못하겠어. 아침마다 텁텁한 입속에 체온계가 들어오는 게 너무 싫어. 여보, 우리 그만하자."
체온을 재고 그래프를 그리는 일을 포기했다. 무모했을지도 모를 그 일을 더 이상은 할 수 없었다. 그 후 아무 생각 없이 몇 달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날 덜컥 임신이 됐다. 이를 어쩐다? 아무래도 딸일 것 같았다. 만약 둘째도 딸이면 그때부터 우리는 또 여러 변수를 염두에 두고 셋째를 가져야 할 판이었다. 셋째가 아들이라는 보장이 없으니 몇 명까지 출산을 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딸은 친정엄마를 닮는다는 속설도 있다. 내리 딸을 4명이나 낳았던 친정엄마를 내가 닮는다면?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 당시에는 아들을 낳을 때까지 계속 출산을 하여 딸부잣집도 유난히 많았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임신과 출산>이라는 양장본 전문지를 한 권 구입했다. 매일매일 그 책을 들여다봐서 출산을 할 즈음에는 그 책이 너덜너덜할 정도였다. 둘째 임신 때는 아예 그 책을 참고하며 지낼 뿐 산부인과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한 번 출산한 경험도 있고 그 책을 꼼꼼하게 읽어가며 임산부 생활 모드로 돌입했다.
첫 아이를 낳을 때의 고통이 트라우마로 남아서 아예 산부인과에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또한 혹시 의사가 딸이라는 뉘앙스를 비췰까 겁이 났다. 당시에는 태아의 성별을 의사가 미리 알려주면 위법이었다.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낙태를 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그러나산부인과 의사들 중에 성별을 암시하는 말을 슬쩍 흘리는 분도 때때로 있었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책을 참고하여 출산일을 계산해 보니 둘째도 첫딸의 생일과 같은 날이었다. 신기했다.
그런데 딸의 생일인 9월 3일이 되어도 아이는 나올 기미가 없었다. 매일 일기를 쓰면서 산통이 느껴지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보름 후에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임신 후 내내 그냥 집에서 지내다가 산달이 찼다. 마침내 진통이 와서 출산하려고 산부인과를 방문했다. 요즘 산모들이 생각하면 상상이 가지 않을 일이다. 산부인과에 들어서자마자 얼마나 아플까 하는 염려는 온데간데없고 아들일까? 딸일까? 그것이 몹시 궁금했다. 드디어 출산 베드에 누웠다.
"어머님, 정신 차리세요. 이러시면 안 돼요."
간호사는 계속 몸이 까라지며 졸고 있는 나를 깨우고 있었다.
"이러시면 제왕절개 수술로 들어가야 해요."
"아기가 호흡이 떨어지고 있어요. 조금만 더 힘내세요."
나는 온 힘을 다하고 있건만 간호사는 자꾸 힘을 주라고 했다.
"응애, 응애, 응애~"
온 몸이 땀에 흠뻑 젖고 지쳐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순간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우렁찼다.
아기가 아들인지 딸인지 그것이 궁금했다. 그리고 혹시 쌍둥이 일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하면 첫딸의 임신때와는 달리 태아가 컸고 태동도 활발했기 때문이다.
"어머나, 아기가 탯줄을 목에 감고 있었네. 이거 너무 위험할 뻔했어요."
그렇게 나는 둘째 아이를 출산했다.
[커버 사진: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