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좋고 물 좋고 인심까지 좋은 가야산 자락이 나의 고향이다. 가야산의 매력을 아는 자가 많으리라. 가야산의 남산인 매화산의 매력과 해인사 입구 홍류동 계곡도 유명하다. 언젠가 그 계곡에서 텐트를 치고 밤을 보낸 적이 있는데, 박지원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라는 수필 문맥이 떠올랐다. 박지원의 글에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강물을 건너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고, 보고 듣는 것이 수시로 병이 됨이라.’
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에 되짚어보니 더욱 맘에 와닿는다.
고향 마을은 유판마 혹은 유촌(兪村)이라고 불렸다. 동구 밖에서 고무줄놀이, 학교 놀이를 했던 곳에 큰 버드나무가 있어서 버들류 ‘柳’의 유촌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그 마을은 앞산에서 쳐다보면 우리나라 한반도와 모양과 똑같이 생겨서 늘 신기했다.
한반도 모양의 유판마, 유촌(兪村) [출처: 합천군]
“우리나라 지도다!”
남산에 오르면 신기해서 외치곤 했다.
남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누구네 집은 우리나라 지도로 치자며 ‘제주도' 부분에 있었고 우리 집은 ‘원산’쯤에 있었다. 뒷산에는 가라굴, 시죽골이라는 산이 있었다. 오후가 되면 우리는 그 산으로 소먹이를 갔다. 때로는 아랫마을 소들과 소싸움을 시키다가 정작 아이들끼리 패싸움이 나기도 했었다. 소싸움에 진 날은 아이들은 자기네 소들을 아프도록 회초리로 때리면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마을이라 마을 앞에는 맑은 시냇물이 흘렀다. 그곳에서 우리는 소꿉놀이, 물놀이를 했다. 큰 바위 위에 올라앉아서 노래를 부르거나 공기놀이를 했었다.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고 즐겁기만 했었다.
그 옛집
우리 집은 마을에서는 지극히 평범하고 그리고 남루했다. 초가삼간이었지만 내가 6살 경에 지붕을 기와로 갈았다. 그날은 어린 나도 좋았는지 부엌 문지방에 올라서서 양손으로 부엌 문짝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그러다가 일꾼들의 점심상을 차려둔 부엌 바닥으로 엎어졌다. 이마에서는 피가 줄줄 흘렀다.
“이 바쁜 날, 가시내가 잔망스럽게 놀다가 이게 무슨 일이고?”
지금도 이마에 흉터가 크게 나 있을 정도로 다쳤다. 어머니는 밥상을 제쳐두고 나를 둘러업고 장터 병원으로 달렸다. 밥공기가 깨져서 그 사금파리가 이마를 찢어서 피를 흘리는 딸을 다독이기는커녕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제시간에 밥을 챙겨주지 못함에 대해 짜증을 내고 있었다. 어린 가슴에 못이 박히도록 상처가 됐다. 그걸 봐도 나의 어머니는 '일 중심형'이었음을 알겠다.
옛 집 [출처: 카카오 맵]
그 집은 큰방, 작은방, 흙바닥 부엌, 뒷방이 전부였다. 마당은 두 걸음 남짓한 폭이었으며 마당 끝에는 외양간, 돼지우리가 있었다. 돼지우리 위에는 통시(‘뒷간’의 방언)가 있었다. 그 흔한 감나무 하나 없어서 옆집 김씨네 감나무 줄기가 우리 뒤란 쪽에 홍시를 철퍼덕 떨어뜨리는 날이면, 우리는 먼저 훑어 먹겠다고 달렸다. 마루 부엌 쪽 벽장에는 할머니가 원기소 같은 귀중품을 숨겨두었다. 방 위쪽 벽장에는 말린 쑥 등을 쌓아두었다. 마루 위쪽에는 굵은 대나무 몇 개를 걸쳐서 만든 시렁이 있어서 소쿠리며 대야 등을 올려두었다.
이 작은 집에서 우리 5남매와 부모님, 할머니가 사는 것도 부족했다. 그런데 작은어머니가 어린 사촌 남매를 두고 가버려서 그들도 우리와 함께 지냈다.
작은 방 아궁이에는 쇠죽솥이 걸려있었다. 늘 그곳에서는 여물을 끓이는 풀냄새가 났었다. 때로는 그 쇠죽솥 아궁이 장작불에서 무를 잔뜩 넣은 청국장 뚝배기가 끓고 있었다.
논 팔고 집 팔고
부모님은 우리 5남매의 교육을 위해서 농사만 바라볼 수 없어서 5일 장에 가마니를 깔고 고무신을 팔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공부를 꼭 시키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계셨다. 나이 터울이 쏘문 우리는 한꺼번에 책가방을 들고나갈 판이었다.
논 다섯 마지기 [출처: 카카오 맵]
“한강의 자갈로도 감당 못 하겠다.”
용돈을 받으러 가면, 어머니는 앞치마에 있는 동전까지 다 털어서 건네어 주며 말했다. 5남매 모두를 4년제 대학을 시킬 즈음에 집안은 그야말로 기둥뿌리가 날아갈 정도가 되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우리의 농사 거리, 묵촌 앞에 있던 다섯 마지기를 팔아야만 했다. 물론 그 이전에 야금야금 띠뱅이 밭과 열 마지기 논을 해치운 후였다. 문전옥답이라 씨만 뿌려두면, 오며 가며 들여다보고도 수확할 수 있는 다섯 마지기였다. 어머니가 끝까지 지니고 있고 싶었던 땅뙈기였다.
마침내 남은 부동산이라고는 고향, 그 옛집뿐이었다.
"장터에서 오르내리기도 불편하고 값어치도 없으니 팔아 치우자."
어머니는 굳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그 옛집을 팔자고 했다. 값어치도 없으니 그걸 팔아 치운들 살림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한 푼이 아쉬운 그때는 그것도 한 사람의 등록금을 해결할 돈은 될 판이었다. 어머니는 허망한 맘을 애써 숨기고 계셨다. 나는 그 서운한 맘을 남몰래 어찌 표현할 길이 없었다.
허황한 약속
할머니의 손때 묻어서 반들거리는 마루를 보니 눈물이 쏟아졌다.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마루 끄트머리에 있던 다듬잇돌이 보였다. 할머니 때부터 사용한 것인데 아마도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쑥돌로 된 것이었다. 직접 만든 것은 아니나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 다듬잇돌이 제발 자기는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듯했다. 나는 작은 방 쇠죽솥 아궁이 앞을 곡괭이와 쇠스랑으로 파기 시작했다. 다듬잇돌을 일단 그곳에 꽁꽁 묻어두었다.
‘성공해서 꼭 찾으러 오마, 꼼짝 말고 기다려.’
나는 다듬잇돌과 약속했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40년이 지나도 그곳에 가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그런 집쯤이야 몇 채도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었지만 나는 고향에 쉽사리 다시 서지 못하고 있다. 고향은 금의환향하여 가는 곳인가 보다. 아들이 큰 사고를 당하여 의식 없이 10년째 병상에 누워있으니 고향에 가는 것이 주눅 든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을 줄 알면서도 자신이 없다. 다듬잇돌을 찾으러 갈 날을 고대하고 있다.
겨자씨 같은 집
알렉산더 대왕이 적군에게 보낸 편지에 겨자씨를 동봉해서 보내며,
‘우리의 수가 적다고 무시하지 말아라! 이 겨자씨처럼 작지만 무섭고 놀라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말을 했다는 속설이 있다.
예수님도 천국을 겨자씨에 비교하며,
‘마치 겨자씨같이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겨자 나무처럼 커진다.’
라고 하셨다.
당시에 사람들은 겨자씨가 가장 작다고 생각했다. 겨자씨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작다. 당시는 현미경 같은 것이 없어 겨자씨보다 작은 것은 볼 수 없었다. 겨자씨는 그렇게 작다. 겨자씨에서 싹이 나고 뿌리를 내리고 자라 새들이 깃드는 거대한 나무가 된다는 것이다. 나의 고향, 그 옛집이 남루하고 초라하지만, 겨자씨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남루한 집에서 함께 지냈던 우리는, 교장 부부, 영어 교사, 노인 복지 센터장, 서민 갑부, 선교사가 되어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 후손들은, 경찰, 박사, 개발자, 통·번역사, 피아니스트 등등으로 또 다음 세대를 이어가고 있다. 아름드리나무 같다.
언제 나는, 고향, 그 옛집에 달려가서 다듬잇돌을 찾게 될까? 허황했던 약속을 지키는 데 시간을 너무 많이 보낸 것에 대하여 쑥돌 다듬잇돌에게 눈물로 사과할 것이다. 다듬잇돌을 찾아와서 내 거실의 한가운데 떡하니 챙겨 놓을 그날이 속히 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