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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찬양Lim Feb 27. 2022

글쓰기 습작 도우미

- 두 분이었다

모로동 할머니    

 

  모로동 할머니는 아랫 담에 셨다. 얼굴에는 온통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틀니가 없던 시절이라 그랬으리라. 이가 몽땅 빠진 할머니의 입은 마치 복주머니를 끈으로 조여 맨 입구 같았다. 내 유년 시절에 모로동 할머니는 하룻저녁도 빼놓지 않고 웃담에 있는 우리 집으로 오셨다. 물론 나의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놀려고 오셨지만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편지 한 장만 써다오.”     


 할머니는 한지를 덕지덕지 바른 호롱 등을 들고 오셨다. 바람이 센 날은 등 속의 호롱의 심지가 흔들려서 불이 꺼지기도 했다. 할머니의 닳은 흰 고무신은 종이처럼 얇았고 그게 찢어질 때면 실로 꿰매기도 했다. 할머니의 고쟁이 바지 속에는 구겨진 양면 괘지가 들어 있었다. 초등학교 2~3학년 때의 일인 것 같다. 나는 할머니의 얘기를 일단 끝까지 들었다. 모로동 할머니는 두서없이 얘기를 하셨다. 건강 조심하라, 여기 걱정은 말라, 무서운 세상이니 몸조심하라, 그런 내용이었다. 특별히 알릴 소식도 없건만, 서울에 사는 손녀에게, 부산에 사는 작은 아들에게, 때로는 인근에 사는 딸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어 하셨다.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주소를 적은 종이는 글씨가 제대로 안 보일 정도로 구겨져 있었다. 모로동 할머니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분이었다.

  할머니의 얘기를 다 들은 후에 내 생각을 잘 입혀서 정성껏 쓴 후에 읽어드리면 두 분 할머니는 훌쩍거리며 울거나 손뼉을 치며 웃기도 하셨다.     

 

“이렇게 속이 후련할 수가 없네. 편지를 이렇게 잘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네. 너는 이 다음에 훌륭한 사람 될 것이야.”  

   

  두 분 할머니의 칭찬에 잔뜩 신이 나서 할머니가 하시는 얘기에 살을 더 붙여가며 썼다. 더 슬프게, 더 재미있게 편지를 썼다. 매일 밤 편지 쓰기를 했고 두 분 할머니는 손뼉 치며 호응하셨다. 모로동 할머니는 알사탕이나 찐 감자를 들고 오셨다. 지금은 두 분 모두 백골이 진토가 되었을 만큼 시간이 많이 지났다. 요즘도 종종 글을 쓸 때,    

 

“에구, 네가 편지를 이렇게 잘 써주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네.”      


  모로동 할머니가 주름 진 입술을 오물거리며 칭찬하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연예인, 여운계 님     

  유명한 연예인 중에 ‘여운계’라는 분이 있었다. 그분은 집안의 먼 친척 올케 뻘이었다. 그분이 우리 집에 온 적이 있다. 어린 나는, 그분이 댓돌 위에 벗어둔 뾰족구두신고 골목으로 나가서 자랑했다. 듣기로는 남편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아서 헤어지느니 마느니 하며 본적지가 있던 우리 마을오셨다고 했다. 나의 아버지는 그 부부를 잘 설득했고 다시 서울로 되돌아가셨다. 그 후 아버지가 그분의 주소를 내게 전해 주셨다. 모로동 할머니의 편지 대필로 쌓아둔 실력으로 여운계 님께 편지를 보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내던 어느 날, 그분이 긴 답장을 보내왔었다. 나도 정성을 다하여 그분께 답장을 썼다. 마을에 일어난 재미있는 얘기나 슬픈 일들을 소상하게 적어 보냈다. 여운계 님은 그 내용에 구체적으로 응답을 하며 깨알 같은 편지를 보내왔었다. 아마도 초등학교 5학년쯤 인 것 같다.    

[출처: 네이버] 여운계 님

 

“귀양, 보세요~”라고 출발한 편지는 어린 나를 무척 신나게 했다. 나는 친구들한테도 자랑했을 뿐 아니라 그 편지를 외울 정도로 여러 번 읽었다. 몇 번의 편지가 오고 갔다.      


“귀양, 방학되면 한번 놀러 와요.”     


  지나가는 말이었을 텐데, 나는 상경하여 여운계 님 댁방문했다. 시골뜨기가 유명한 연예인의 집에 갔으니 어리둥절했다. 일하는 사람을 따로 두고 있는 게 신기했다. 넓은 거실이 시골에서 보지 못했던 신 문물들이 다 좋게만 보였다. 여운계 님은 바느질을 좋아한다며 반짇고리 통을 껴안고 뭔가를 만들고 계셨다. 촌티 줄줄 흐르는 에게 시누이 뻘이라고 존대어를 쓰며 잘 대해주셨다. 옛 얘기 나누며 다시 만나고 싶은데 애석하게도 그분은 2009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동화작가로 등단했고 문학회 회원도 되었다. 동화책 두 권을 출간한 적도 있지만 거의 20년간 글을 쓰지 않고 지냈다. 그러나 때로 뭉클거리며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기회 닿아서 브런치 작가로 등단했다. 이제 내가 글을 쓰고 싶으면 언제라도 쓸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며 놀이터가 생겨서 참 좋다. 함께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내 놀이터는 재미가 솔솔 난다.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으나 통과 과정이 결코 만만치 않은 브런치 작가로 등단됐다. 요즘 트렌디한 브런치 작가가 되는데 일등 공신이셨던 모로동 할머니와 여운계 님께 감사드린다. 어린 가슴에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던 두 분은 내 글쓰기 습작 도우미였다.


'그렇다면 나는, 누군가에게 무엇으로라도 도우미가 되는 삶을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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