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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 찬양Lim Mar 08. 2022

더 늦기 전에!

- 브런치는 사랑을 싣고~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에서 유명인들이 오래전에 헤어졌던 지인을 찾아서 해후하는 장면을 종종 보아 왔다. 때로는 지인을 찾았지만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경우도 있었다.  '브런치'통하여 꼭 찾고 싶은 분이 있다. 더 늦기 전에, '브런치는 사랑을 싣고'라고 외치며 그분을 만나 뵙고 싶다.


 고교 진학을 앞둔 때였다. 면 소재지에 있던 고등학교에서 교사 한 분이 우리 집에 오셨다. 그 고등학교로  진학하면 대학까지 시켜주겠다고 했다. 이웃 고장인 거창에서도 몇 분의 교사가 찾아왔다. 그 고등학교는 미국과 연계되어 있어서 유학까지 보장한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공무원은 발령장 하나면 다른 학교로 이동하게 되는 거다. 그런 말은 믿을 필요 없다.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 하는 거다. 촌구석을 떠나서 진주나 마산으로 진학해라."


 총총이 5남매에, 빠듯한 집안 형편인데 무슨 배짱으로 션찮은 딸자식을 도회지로 내보내어 공부를 시킬 작정을 하셨는지? 의논 끝에 진주 여자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했다. 그 시절에는 명문 여고였고 시험을 치고 들어가는 곳이었다. 그런데 진주는 친척 하나 없어서 내게는 생면 부지한 곳이었다.

   드라마 극본처럼 귀인이 짜잔 하고 나타났다. 그분은 다름 아닌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이다. 공교롭게 중학교 3학년 때 우리 학교로 부임하신 것이다. 내가 진주여고에 진학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진주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당신의 친구에게 나를 부탁하신 모양이다.

 입학시험을 치러 갔을 때, 그 친구분의 사모님이 시외버스 터미널로 마중을 나와 계셨다. 그 댁에서 숙식하며 시험을 봤고 운 좋게도 합격을 했다. 어렴풋이 기억해보면, 노모가 계셨고 나보다 연배가 높은 몇 남매가 있었던 것 같다. 학교 오가는 길에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고 그 댁의 마당 한편에서는 천리향이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사모님은 말 수가 적었으나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시는 분이었다.

 그 댁에서 가까운 곳에 내가 지낼 방을 얻어주셨다. 처음으로 시작하는 자취 생활이었다. 방의 천장은 참 높았다. 낮은 에서만 지냈던 내게는 그 모든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간장병과 참기름병만 을씨년스럽게 큰 방의 모서리 공간을 채웠다.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은 연탄불이 꺼지지 않게 간수를 잘해야 했다. 그 사모님은 아침저녁으로 내 방의 연탄불을 주셨다. 그런데 나는 일을 내고 말았다.


 입학하자마자 연이어 돈이 들었다. 교복을 맞추고 가방을 사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교련복도 마련했체육복도 필요했다. 서서히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 집 형편은 넉넉하지 않은데 그런 것을 다  구입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 학교는 교내에 있을 때에는 실내복을 입었다.

" 반드시 다음 주까지 실내복을 구해서 입도록 하세요."라던 담임 선생님의 말씀 듣고는 학교를 그만 다녀야겠다고 맘먹었다.


'이러다가는 우리 집이 홀딱 망하겠다.'

 나는 간단하게 짐을 싸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부모님은 난데없이 돌아온 나를 보고 몹시 놀라셨다. 학업을 그만두겠다는 나를 부모님은 설득했다.


"이 시대는 배워야 살 수 있는 법이다. 엄마는 못 배운 것이 평생 한이다. 너는 반드시 공부를 해야 한다."


"낮에는 직장에 다니야간 고등학교에 다닐 게요. 밑에 동생들도 많은데 우리 가정형편으로 아무래도 제가 공부를 그만해야 할 것 같아요."


 온종일 어머니와 실랑이를 했고, "그러면  두고 온 짐을 가지러 가자."라며 어머니가 먼저 앞서가셨다. 진주로 가는 버스에서 어머니는 내내 우셨다.

 "미안하다. 네가 집안 걱정으로 공부를 안 하겠다고 하다니 다 내 잘못이다."


 진주에 도착하니 어머니는 돌변하셨다.

 "나는 남강 물에 빠져 죽으련다. 자식 공부시키려고 살았는데 네가 공부를 하지 않겠다 하면 나는 살 필요가 없다."

 어머니는 진짜 단단히 결심하신 듯했다. 두려웠다. 무섭기도 했다.


 '에라, 모르겠다. 집안 형편 생각할 게 아니라 어머니의 죽음은 막아야겠다'라고 생각하며 그 선생님의 댁으로 돌아갔다. 밤이 몹시 깊은 시간이었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사라진 나 때문에 선생님의 집은 발칵 뒤집혔다. 연탄불을 갈아 주러 가보니 내가 깜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와 함께 그 선생님 댁에 들어가니 온 가족이 반색을 하며 반겼다.

"애가 아직 철이 없어서, 고향도 그립고 맘이 복잡했는지 갑자기 고향으로 왔더라고요, 겨우 달래서 데리고 왔어요. 이제 열심히 학교 다닐 거예요." 어머니는 설레발을 치듯 말씀하셨다.

  김병문(성함이 그랬던 것 같다.) 선생님을 두서너 번 뵀을 뿐이다. 그 밤에는 진지하게 그분 앞에 앉았다.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의 친구분!

 선생님은 조용히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하시며 공부를 해야 되는 이유를 말씀하셨다. 갈피를 못 잡고 있던 나는 단단히 맘을 다잡았다. 다시 학교에 잘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그분을 아직도 만나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내 인생에 징검다리가 되셨던 그분과 가족분들을 꼭 만나고 싶다.


'어려운 길은 아름다운 목적지로 이끈다'라는 말이 있다. 그분을 떠올리며 글을 쓰는 내내 이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지금 어려운 길에 서있어도 우리의 아름다운 도착지를 그려보게 하는 말이 있다. 영어로는,

"Difficult roads often lead to beautiful destinati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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