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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 찬양Lim Aug 02. 2023

적어도 내게는 '이불 사변(事變)'이었어요

-  방학 해프닝이 끊이지 않네요

나는 이 사태를 사변(事變)이라 일컫고 싶다. 가히 사변(事變)적이다.



지난 주말에 딸내미가 카톡으로 말했다.


", 이불 좀 버려야 될 것 같아요."


"그래? 가져 봐. 쓸만하면 세탁해서 본가에 가져다 둘게. 아니면 황색 봉투에 넣어서 버리고..."

[딸이 보내온 이불 사진]

  

딸이 이불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어, 내가 사 준 것이네..."

그 사진을 보고 내가 말했다.


->   ->     ->


그렇다. 그 이불은 내가 2년 전에 딸내미에게 사줬다.


사위가 박사 학위 과정이라 줄포항에서 지냈던 딸이 2년 전에 서울로 올라왔다.


맘먹은 곳에 덜컥 취업이 되었다.


딸이 근무하게 될 직장은 강남이었다. 인천 계양구에 있는 우리 집에서 잠시 출·퇴근을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옥철을 타고 다녀야 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다행히 딸의 후배가 강남에 살고 있어서 그곳에 잠시 지내기로 했다.

그래서 간단한 이부자리와 필수 살림살이를 내가 갖춰 주었다. 


두 달쯤 후에 사위가 학위를 땄졸업했다. 사위도 K대 포스트 닥터 자리로 가게 되어 딸네는 포항에서 강남으로 이사를 다. 우리 집에서는 차로 50분 정도 걸리는 곳이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마다 딸 내외가 우리 집에 와서 잠을 자고 일요일에 함께 예배를 드리며 교제하는 일이 가능했다.




"저의 취미는 퇴사, 특기는 입사입니다."


딸은 프로트엔드 개발자다. 딸은 근무하는 회사가 꼰대끼가 있으면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다른 회사에 곧잘 취직이 되었다.


대부분 남자 개발자인 그 세계에서 딸은 자기 몫을 잘 해내고 있다. 어떤 때는 남자 개발자 17명 중에 홍일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도 딸을 대할 때 '여자니까 어쩌고' 하는  마인드를 가지지 않는다.


'프론트엔드' 개발자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딸이 그 일이 대단해 보인다. 


딸이 우리 집에 왔을 때, 

"여자가 그게 뭐냐? 여자가 이런 건 해야지." 등의 말을 일절 하지 않는다. 당당히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일을 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여자니까 뭘 해라 하는 것은 짐을 얹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자니까 청소하고, 설거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딸을 대한다.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남, 여 상관없이 치열하게 살고 있는 딸이다.  그래서 친정에 왔을 때 세상에서 제일 편하게 쉬었다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의 진심이다. 만약 딸과 같은 일을 하는 며느리가 있다면 그런 맘이 생길지 모르겠다.


보아하니 사위가 주방을 맡은 듯하고 빨래는 각자가 알아서 하는 듯하다. MZ세대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그들이 다소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그들 세대에서는 맞는 것이리라. 




딸이 그렇게 직장 생활하다 보니 집안일은 아무래도 잼뱅이일 듯하다. 갑자기 이불을 버리고 싶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분리 수거하기도 쉽지 않아서 엄마한테 SOS를 친 것 같았다. 이불을 가지고 온 주말이었다.


그들이 강남으로 출발하기 전에 자동차에서 이불 꾸러미를 꺼내 집으로 가져왔다. 곧바로 이불 세탁부터 했다. 버리겠다는 이불 더미 속에 침대 커버도 있었다. 하얀색이었다.


어? 그런데 침대 커버에 생리 흔적이 선명했다. 여성이라면 생리가 새는 일은 한두 번 겪는 일이다. 이걸 못 빨아서 친정으로 가져왔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장 나만이 아는 특별 세탁 방법으로 빨았다. 침대 커버에 묻은 흔적이 깜쪽같이 지워졌다. 


깨끗해진 침대커버 사진을 딸에게 보냈더니,


"어?  저도 그 커버를 세탁기로 빨았는데 흔적이 그대로였어요."라고 말했다. 그런 것은 세탁기에 돌리기 전에 부분 세탁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을 딸이 몰랐던 것 같다.



 

이어서 딸이 가져왔던 이불 하나를 세탁한 후에 건조기에 돌렸다. 


망했다. 그 이불에도 생리 자국이 있었다.  건조된 이불을 개다 보니 생리 자국이 그대로 있었다. 세탁기에 집어넣을 때 미처 못 봤다. 건조기에 넣을 때도 아무 생각 없이 작동 버튼을 눌렀다.


"조.졌.다."


요즘 핫한 그 유튜버 영상이 떠올랐다.


 https://youtu.be/rgDH_x3F-kE


그 유튜브에 나오는 분처럼 나도 일을 조졌다. 완전히 헛일을 한 셈이다. 없었던 일이라 치고 다시 나만의 노하우인 마법의 세제 용액을 만들어서 그 얼룩을 지웠다. 그러나 침대커버와는 달리 감쪽같이 지워지지는 않았다. 


딸이 미리 나에게 "사실 이만저만하여 이불을 버릴 작정이다."라고 했더라면 그 부분을 미리 부분 세탁한 후에 세탁기에 돌렸을 텐데... 그랬더라면 헛수고는 하지 않았을 텐데... 아쉬운 맘이 들었다.





흔적이 있는 부분을 몇 시간 세제 액에 담가 두었다가 부분 세탁을 했다. 그런 후에 다시 이불을 세탁기에 돌린 후에 이어서 건조기도 돌렸다. 마치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했던 일을 다시 반복했다. 


건조기에서 나온 이불을 밤새 좀 더 바람을 쐬려고 빨간 의자에 걸쳐두었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불에 벌겋게 물이 들어 있었다. 건조기에서 갓 나온 뜨거운 열기가 빨간 의자의 비닐 부분 색상을 흡수한 것이었다. 그것을 지우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부분 세탁으로 빤 후에 다시 세탁기에 돌렸다.


반복하여 이 짓이 몇 번 짼가?

머피의 법칙이 생각났다. 일이 좀처럼 풀리지 않고 오히려 갈수록 꼬이기만 하니 말이다. 


[깜쪽같이 세탁하여 안방 편백침대의 커버로 사용된 침대커버 / 빨간 의자]


[흔적이 남은 곳에 아플리케로 스티치한 이불/ 여러 차례 세탁과 건조를 끝내고 본가로 가려가기 위해서 개어둔 이불]


에라 모르겠다. 포기하자니 몇 번 했던 세탁과정에 쏟은 노고가 아까웠다. 게다가 황색 봉투에 버린다 해도 건조해서 버려야 할 테니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한번 세탁과 건조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멀쩡한 이불을 그 정도 때문에 내다 버린다는 것은 용납이 안 됐다.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끝까지 사용해야 한 다는 것이 나의 생활신조다. 게다가 아직은 쓸만한 이불이지 않은가? 


이제 마지막 단계는 얼룩이 덜 지워진 부분을 아플리케 기법으로 캄푸라치 하는 작업이다.


거실에 이불을 펼쳐놓고 비슷한 색깔로 덧댔다. 얼른 보면 흥부네 이불같이 궁상맞아 보인다. 그러나 그 반대가 될 수도 다고 생각했다. 


바느질하는 동안에, Mean Girls, <퀸카로 살아남는 법>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라서 혼자서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 영화에서 보면, 인기쟁이 '레지나'는 자기의 나시티에 구멍이 났을 때 전혀 당황하지 않고 당당히 입고 다닌다. 그걸 보고 학생들이 나시티에 구멍을 내고 입는 것이 유행이 된다. 


그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면서 내가 만든 이 이불이 유행이 되는 시대가 올 수도 있겠다며 이불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나를 위로했다. 

[사진 출처: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ds941014&logNo=222066327548]




사태가 이쯤에서 끝이 아니었다. 세탁하여  건조된 이불을 보자기로 잘 쌌다. 본가에 가져다 둘 참이었다. 그곳에서 지내는 활동지원사들이 여러 분이라 본가에는 이불은 많으면 많을수록 다다익선이다. 보자기로 이불을 싸 두니 마치 피난민 보따리처럼 보였다. 전쟁이 따로 없었다. 이불사변이다.


그 보따리를 캐리어에 싣고 카카오 택시를 불렀다. 체감 온도 39도였다. 한낮에 트렁크를 열어 택시를 타는 손님이 반가울 턱이 없을 것 같았다.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 정도인데 택시를 타는 것도 죄송했다. 장거리 손님이 택시기사님한테는 반가울 텐데...


평소에 카카오 택시를 잘 이용하지만 한 번도 평가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날은 꼭 별 다섯 개를 보내드리고 싶었다. 

나의 이불을 실은 카트를 잘 옮겨 주신 택시 기사분이 참 감사했다. 




여름 방학을 맞아 일어날 일이 스펙터클 할 것 같았던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상상해보지도 않았던 이불 사변을 겪었다. 


그 이불은 아들이 지내는 본가의 장롱 안에 무사히 잘 안착되었다. 

누군가 그 이불을 따뜻하게 잘 덮을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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