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복이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남편은 '일복'이 지지리도 없다. 일이 남편을 피해 다닌다. 집안에 할 일이 생겼을 때 나 혼자 끙끙대며 수습하고 나면 때마침 남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기 일쑤다.
"에공, 일이 당신을 피해 다니네, 막 이걸 끝냈는데..."
"어이구 이 사람아, 그걸 혼자 하다니... 내가 오면 하지."
우린 늘 이런 식이었다. 나는 집안에 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남편이 해주기를 기다리지 못한다. 때로는 나 혼자 하는 것이 차라리 속 편하다.
남편은 공직에 10년간 근무했었다. 그때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직장에서 야간 근무를 하는 숙직이란 게 있었다.나는 은근히 그날을 기다렸다.
그날이 되면 혼자서 으레 잔치 국수를 끓여 먹었다. 국수를 삶은 후 찬물로 헹구다가 손가락으로 후루룩 국수를 훑어 먹으면 그 맛이 별미였다. 양념을 하지 않은 국수는 고유의 맛을 더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남편의 숙직 날이 되면 나는 슬슬 집안의 가구를 재배치했다. 무거운 진열장이나 서랍장을 혼자서 옮겼다. 어쩌다 남편과 함께 그런 일을 하면 서로 호흡이 맞지 않아 남편이 손을 찧거나 발을 다치기 십상이었다. 어쩌다 무거운 가재도구 등을 옮길 때는 장판을 찢기도 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혼자 하는 게 나았다.
"일은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요령으로 하는 겨."
친정어머니는 농사일을 척척 해내시며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런 어머니로부터 유전이 되었는지 웬만한 일은 겁이 나지 않았다. 일의 요령을 먼저 생각하고 일을 시작하면 웬만한 일은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어머니의 말이 맞았다. 요령으로 일을 해낸 적이 있다.
언젠가 방안에 있던 흙침대를 혼자서 거실로 옮긴 적이 있다. 순전히 요령으로...
중증환자인 아들이 지내는 방에 환자용 침대 외에 흙침대가 있었다. 야간에 간병하는 분이 자는 침대다.
"Y에게 '편백·황토 기능성 침대'를 마련해 주면 자율신경 안정에 도움이 될 것 같아요. "
그 당시 우리는 황토의 원적외선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던 터라 아들을 그 침대에 잠시 동안씩이라도 눕히고 싶었다. 그 '편백·황토 기능성 침대'를 아들 방에 두려면 기존에 있던 흙침대를 거실로 빼내야 했다. 그날 남편은 야간에 아들을 간병하고 작은 방에서 쪽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혼자서 흙침대를 거실로 빼낼 수 있는 방법을 골똘히 생각했다. 힘이 문제가 아니라 요령만 있으면 가능할 것 같았다. 균형과 평형의 원리를 이용하여 그 침대를 거실로 꺼냈다. 내 몸 무게의 몇 곱절은 되는 흙침대였다. 인지 없는 아들은 아마, 침대를 부여안고 씨름하고 있는 엄마를돕고 싶었을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이게 어떻게 거실로 나올 수 있어? 당신 안 다쳤어? 내가 일어나면 하지. 함께 하면 훨씬 쉬웠을 텐데..."
"괜히 당신과 하다가다치면 안 되죠. 잘못하면 장판이나 찢을 것 같아서 그냥 혼자 했슈.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
남편은 거실 한쪽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흙침대와 나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짐짓 놀란 표정이었다.
" Y가 엄마 힘들다고 응원하는지 물끄러미 보고 있더라구요."
사실, 지금생각해도 아찔하다.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은데 그때는 그게 가능했다.
이렇게 살아가다 보니, 아들을 돌보는 활동지원사 샘들도 집안에 손볼 일이 생기면 나에게 먼저 말했다.
남편에게 어찌해 달라고 말을 꺼내봤자, '집사람한테...'라고 하니까...
그래서 그분들은 남편의 별명을 '집사람한테'라고 부른다.
아들때문에 세컨 하우스가 필요했다. 마침내 주택법이 허용되어 세컨 하우스로 원하는 평수의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올해 3월에 그 아파트에 입주했다.
이사를 하고 보니 손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주일 후에, 한달 후에, 3개월 후에...차근차근할 일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선반 달기 성공~]
싱크대 상부장에 '설거지 선반'을 달아야 했다. 싱크대를 새것으로 리모델링할 때 설거지 선반도 설치해달라고 업자에게 부탁했었다. 그런데 싱크대 수전의 위치가 어중간하여 선반 설치를 할 수 없단다. 아예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설거지 선반 박스를 뜯지도 않은 채 그대로 두고 갔다.
전문 업자가 포기한 그 설거지 선반 설치를 내가 한번 해봐야겠다고 맘먹었다.
준비물은 줄자, 드라이버, 송곳, 연필 등이었다. 밑에서 위로 보고 하는 작업이라 고난도 작업이었다. 먼저 줄자로 부착할 곳을 정확하게 잰 후에 연필로 점을 찍었다. 혼자서 하기 힘든 일이었다. 미션 임파서블~
전동 드라이버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게 뭐 필요할까 싶어 구비해 두지 않고 지냈다. 집 앞에 있는 '다ㅇ소'로 달려갔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다ㅇ소'에 전동 드라이버가 있다고 했으나 내가 들른 그곳에는 없었다. 철물점에 가니 대형 전동 드라이버만 있었다. '쿠ㅇ'에도 마땅한 것이 없었다.
'안 되면 되게 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하자.'
나는 군인 정신으로 일을 해내는 '일 중심적인 사람'인 것 같다. 집안에 있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가져다 놓고 그 위에 설거지 선반을 올렸다. 그런 후에 연필로 점찍어 둔 곳에 정확하게 나사못을 박아 넣었다. 수동 드라이버를 이용하여 아마추어 실력으로 선반을 부착했다. 나사를 돌리는 동안에 선반을 잡아 줄 사람이 없으니 일은 배나 힘들었다.
일을 막 끝내고 나니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이 사람이, 이걸 혼자 하는 여자가 어디 있어?"
"여기."
"당신은 여자가 아니야."
"나 여자 맞는데요? 그거 성 차별 발언입니다."
"그나저나, 당신, 대단하네, 어떻게 이걸 달아? 신기하네."
남편은 혹시나 하고 설거지 선반이 안전하게 잘 부착되었는지 이리저리 체크를 해보고 있었다.
"아주 든든한데..."
"괜찮죠?"
꼼꼼하기 그지없는 남편이 합격점을 주는 게 아닌가?
[거울 / 시계 / 그림 액자는 이사하는 날 부착됨]
[거울의 고리에 나사못을 먼저 끼운 후에 벽에 박아야 한다./ 집안에서 일할 때 없어서는 안되는 나의 최애 스툴의자]
그다음은,
거울을 벽에 달아야 했다.
남편은 원래도 그랬지만 이전 세컨 하우스에서 겪었던 일 때문에 콘크리트 벽에 못 박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그 집에는 수많은 대못이 쓸데없이 여러 군데 박혀 있었다.
"아마 이전 주인의 눈에 귀신같은 게 보인 게 아닐까요?"
"그런 거 잡느라고 대놓고 아무데나 못을 박은 거 같은데, 허허허."
문간에 부적도 여러 장 붙어 있었다.
"콘그리트에 저렇게 마구 못을 박으면 집이 다 상하지..."
남편은 집이 상하는 것에 대한 염려증이 있는 듯했다.
그래서 도배·장판 하는 분에게 별도로 부탁하여 온 집안에 있는 못을 다 뽑아 달라고 했다. 그런데도 그분이 미처 보지 못한 곳에 몇 개의 못이 더 있을 정도였다.
"이 집에서는 벽에 못을 단 하나도 박지 마시오. 집이 상하니..."
"참 희한한 성격이네요. 그래도 필요한 것은 달아야죠."
"혹시 장롱이나 다른 가구에 스티커 고리 같은 걸 부착하는 것은 괜찮지만 콘크리트 벽에는 아무것도 걸지 마시오."
절대 군주가 따로 없다. 그래도 싫다는 사람이 있는데 굳이 우겨서 못질하면 뭐 하나싶어서 4개월을 참고 지냈다.
그런데 방학이 되니 슬슬 집안 손질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벽시계를 거실 바닥에 기대놓고 지냈다. 못을 박을 수 없으니... 거울도그냥세워 두고 사용했다.
안방 입구벽면 빈 공간을 툭툭 치니 콘크리트가 아니었다. 때마침남편이 집에 없었다. 남편이 없을 때 후딱 해치우리라.
'난 할 수 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마인드 컨트롤 하며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전신거울은 원목이라 상당히 무거웠다. 혼자서 할 일이 아니었다. 그걸 잡아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도 시작해 봤다.
줄자로 정확한 위치를 재고 연필로 나사못 박을 위치를 표시했다.
아뿔싸, 그런데 거울에 달린 고리는 못을 박은 후에 그냥 거는 것이 아니었다. 고리에 나사못을 끼운 후에 거울 채로 나사못을 돌려서 달아야 하는 원리였다. 집안에 있는 의자, 쿠션, 타월등을 대동했다. 그리고 나는 스쿨의자에 올라가서 일을 시작했다. 집안일을 할 때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스툴 의자다. 키가 작은 내게는 그것이 필수품이다.
스툴 의자 위에 거울을 걸쳐 놓으니 표시해 둔 지점보다 높았다.
휴지통 위에 거울을 올려보니 이제는 또 너무 낮았다. 그 위에 쿠션을 얹으니 또 약간 높았다. 발 닦는 타월을 여러 번 접어서 받치니 딱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거울을 잡아주며 구시렁 댈 남편보다 차라리 나았다.
일단 휴지통 위에 놓인 수건 받침에 거울의 무게를 의지하고 작업을 시작했다. 송곳으로 벽에 애벌 구멍을 뚫었다. 그 자리에 십자드라이버로 미리 나사못이 들어갈 자리를 어느 정도 뚫어 두면 일이 더 편하다. 마침내 나사못을 거울에 달린 고리에 끼웠다. 미리 만들어둔 받침(휴지통 위에 타월을 놓은 것)에 거울을 올렸다.
"거울아, 거울아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나는 거울에게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쁜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신신당부했다. 거울이 거기서 떨어지면 와장창 큰일이 날 판이었다. 그러면 남편한테 구사리를 엄청 들을 게 뻔하다. 다행히 거울은 얌전히 있었다. 나사못만 직각으로 제대로 잘 돌리면 거울 다는 일이 끝난다. 나사가 슬슬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사못이 제대로 돌아갈 때 느끼는 쾌감은 느껴본 자만이 알 것이다.
이럴 때 전동 드라이버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하염없이 나사못을 돌렸다. 나사못을 죄었다. 잘 들어가고 있었다. 땀이 줄줄 흘렀다. 드디어 거울이 제대로 안성맞춤으로 달렸다. 덤으로 벽시계도 안방 문설주에 달았다.
혼자서도 잘해요.
"뭐 바뀐 것 없나요?"
"에헤, 또 뭔 일했나 보네."
남편은 내가 무엇을 했는지 단번에 알아내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대단한 일을 했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