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는 매년 '미니 이사'를 한다.
한마디로 책상의 짐을 꾸린다. 다른 교무실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5년 만에 한 번씩 다른 학교로 옮긴다. 그래서 짐 꾸리는 데는 이력이 나 있다. 어떤 때는 내 자리로 동료가 일찌감치 짐을 챙겨 밀고 들어오기도 한다. 그럴 때는 후딱 짐을 빼주어야 한다.
이번에는 아예 교직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퇴임 짐을 꾸렸다.
먼저 학교에 반납해야 할 것을 챙겼다.
코로나 때문에 앞당겨진 ICT 기반 수업, 그걸 하기 위한 장비들이 만만치 않았다. 웹캠은 컴퓨터 모니터에 그대로 부착해 두면 된단다. 이어캡, 삼각대(수업장면 녹화용), 노트북 등을 반납해야 했다.
그중에 카메라 삼각대는 아예 사용하지 않았다.
원격 수업 초기에, 교사는 학생 없이 혼자 수업하여 그 장면을 녹화한 후에 EBS 온라인 클래스에 탑재했다. 카메라나 휴대폰을 삼각대에 올려놓고 녹화했다.
그런데 녹화된 수업 영상은 용량이 컸다. 탑재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렉이 걸리는 등의 에러가 나기도 했다.
나는 녹화 영상 대신에 수업용 PPT를 만들었다. 그것을 '슬라이드 쇼'하여 '화면녹화'했다. 그러면 영상이 만들어졌다. 또한 PPT를 '영상으로 내보내기'로 하여 EBS온라인 클래스에 탑재했다. 바로 그거였다. 용량도 확 줄었다. 동료교사들이 그렇게 하는 방법을 내게 물어보기도 했다. 삼각대를 보니 비대면 수업을 위해 대처했던 수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짐 정리를 하다 보니 스테이플러가 5개나 있었다. 그것을 락커 위에 나란히 진열해 두었다. 그 교무실에서 누구나 사용하라는 의미로...
새로운 단원을 시작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학습지를 배부했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각 과목의 학습지를 받아 관리하는 일이 골치 아플 것 같았다. 그래서 각 단원의 학습지를 바인딩하도록 했다. 캐리어에 학습지를 싣고 스테이플러도 챙겨 갔다. 학습지를 배부한 후에 스테이플러를 분단별로 하나씩 나눠 주었다. 페이지를 잘 확인하여 분철하도록 했다. 그러면 낱장으로 학습지를 나눠 줄 필요가 없었다.
락커에 마이쮸 젤리 사탕도 한 봉지 남아 있었다.
대용량이다. 학기말 마무리 수업 때 학생들이 받은 도장의 개수대로 사탕을 교환해 주곤 했다. 학생당 평균 도장 개수가 10개 정도 된다. 한 학급당 300~500개의 사탕이 필요했다. 6개의 학급을 맡아 수업하니 학기말이 되면 사탕을 박스 채로 구입하곤 했다.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열심히 발표에 참여하여 도장을 모았다. 도장 파티를 하는 날, 학생들의 입이 벌어지곤 했다. 도장을 하나도 못 받은 학생은 없다. 왜냐하면 학급 전체에게,
"오늘 수행평가 발표 준비를 매우 잘했으므로 모두에게 도장 한 개씩 쏩니다."
"학습지를 안 가져온 학생이 한 명도 없는 반은 칭찬받을 만하지... 그래서 모두 다 도장 한 개씩~"
이렇게 외쳐주는 날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외 없이 사탕을 받을 수 있다. 다만 그 개수에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도장의 개수가 많은 학생들에게는, '수업 과제를 잘 수행하고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이라는 한 줄 멘트를 학생부에 기록해 준다.
그 사탕을 BTL실에 전해 드리기로 맘먹었다.
항상 땀 흘리고 수고하는 BTL실 직원들이 젤리 사탕으로 목을 축이면 딱이다. 사탕으로 당보충을 하면 좋을 것 같았다.
우리 학교는 BTL 건물이다. 그래서 학교 화장실과 복도 등을 청소하는 분이 있다. 학교 시실물 관리하는 분, 숙직하는 분도 있다. BTL(Build-Transfer-Lease)은 민간이 공공시설을 짓고 이를 정부에 임대하여 투자금을 회수하는 새로운 개념의 민자 유치제도다.
내가 학교 도서관 업무를 맡았을 때도 여분의 쿠키나 크래커, 초코 파이 등을 BTL실에 간식거리로 전해 드리곤 했다.
BTL실 K여사를 뵌 지는 7년이 넘었다. 우리는 별다른 대화는 하지 않지만 만날 때마다 목례를 하며 인사를 나누곤 했다. 그런데 그 여사님을 대할 때마다 친정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의 속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니는 키가 작고, 못 생겼으니 공부밖에 다른 길이 없다."
그래서 나는 주문에 걸린 사람처럼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항상 1등을 해야만 하는 줄 알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자녀를 공부시키는 일'이 어머니에게는 곧바로 신앙과 같은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은 너네들이 출세하기를 바라서다. 나는 못 배워서 이 고생인겨. 너희들은 하여간 공부를 해야 하느니라."
그러나 연년생 터울인 5남매가 다 책가방을 들고 나서니 자녀 교육에 드는 돈이 한강의 자갈로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어머니의 레퍼토리)이었다. 나는 가정 형편을 생각하여 공부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보이콧을 한 적도 있다.
"네가 지금 공부를 그만 두면 너는 공장에나 다녀야 하는 겨. 나처럼 고생하며 인생을 살게 될 겨. 그리고 청소부나 하며 살게 된다."
어머니는 내게 공부를 하지 않으면 고생하는 직업을 가지고 평생 살게 될 것이라고 수없이 세뇌를 시켰던 것 같다. 나는 집안 형편을 생각하여 한사코 공부를 그만두고 공장에 가서 돈을 벌겠다고 우겼다. 어머니는 내가 공부를 그만 두면 차라리 남강에 빠져 죽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기고 했다. 어머니와 그렇게 옥신각신하며 공부를 했다.
어머니는 시골 촌부였지만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셨다. 우리 5남매는 그렇게 대학을 나왔다. 어머니의 악착같은 공부 바라지로 오빠 내외는 부부 교장이 되었다. 어머니에게는 그게 바로 깃발이었을 수도 있다. 남동생은 독일 선교사로 사역 중이다. 둘째 여동생은 사회 복지 센터 운영, 막내 여동생은 자산가가 되었다.
BTL실 여사님을 대할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났다.
엄마가 공부하라고 부추기지 않았더라면 나는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공장에 다녔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나는 교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돌고 돌아 학교에서 청소하는 여사님으로 살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다. 교사나 청소하는 여사님이나 힘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그 차이는 있을 것 같았다.
여름이면 땀을 흘리는 모습, 겨울이면 추위에 떠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를 공부하도록 이끌어 주셨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 하여간 어머니의 지론은 전문 직업을 가지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K여사님이 장미 한 송이를 들고 도서관에 오셨다.
"이걸 제대로 간수할 분에게 드려야 할 것 같아요."
내가 도서관 업무를 담당하고 있을 때였다. K여사는 활짝 핀 장미 한 송이를 챙겨 오셨다. 가지가 부러진 장미였다.
또 어느 날, K여사님이 말했다.
"저는 선생님 팬이 됐어요."
"왜요?"
"어제 축구하는 것 보고 반했어요."
"어머, 그러셨어요. 감사합니다."
나는 사제동행 축구 대회에서 홍일점으로 출전하여 축구 경기를 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응원을 많이 하셨단다.
https://brunch.co.kr/@mrschas/95
( △ 축구 에피소드가 실린 브런치 글)
K여사님이 복도에서 내게 말했다.
"정말 서운하네요. 상상이 안 돼요. 선생님이 떠나신다는 게."
"저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함께 대화를 나누고 교제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서로를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7년이란 세월 동안...
어느 날, K여사님은 국산 들기름 한 병을 전해 주셨다. 고소하고 정겨운 이별 선물이다. 냉장실에 넣어둔 들기름을 감히 먹을 생각을 못하고 있다.
내가 학교를 떠나는 것은 학생들과의 이별만이 아니었다.
행정실이나 BTL실 식구들과도 이별이었다. 또한 그것이 학교 문화와의 석별이었다.
그리고 K 여사님이 내내 그리울 것 같다.
[사진: 쿠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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