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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 찬양Lim Apr 11. 2022

교회 후배, 은도!

- 영원히 나의 멘토가 되어주오

   꿈도 진로도 모른 채로 뭔가에 떠밀려서 나는 '진주여고' 학생이 되었다. 집안 형편이 딸내미를 타 도시에서 공부를 시킬 정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들이 잘 맞아떨어져서 집을 떠나서 진주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주만에 학교를 그만둬야겠다는 맘이 생겼다. 이러다가는 집안 살림이 거덜 날 것 같았다. 학교생활을 더 하느니 마느니 하며 부모님과 티격태격했다. 겨우 마음을 잡고 진주에서 1년을 보낸 후에, 교회에 다녀야겠다고 맘먹었다.


  학급에서 제일 예뻤던 경아(가명)와 함께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서는 그 애에게만 관심을 두는 것 같았다. 그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던 나는 그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경아에게는 말을 하지 않고 다른 교회에 다니기로 했다. 


  옮겨간 교회에서 '은도'라는 후배를 알게 됐다. 은도가 웃으면 하얀  박꽃이 연상됐다. 은도는 학생회 여부회장이었다. 은도에게서는 큰 살림집 안주인 같은 느낌이 풍겨왔다. 학생회 행사의  뒤치다꺼리를 능숙하게 잘 해냈다. 대표 기도할 때의 완숙미, 찬양할 때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며 양 갈래로 묶은 머리, 학생복에 갖추어 신은 검정 단화 등등 모든 것이 내게는 대단해 보이는 것이었다.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은도를 좋아했을 것이다. 일명 짝사랑이었을 것이다. 은도는 나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조금씩 지나고 은도에게는 눈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학교를 마치고 습관처럼 들리는 교회의 지하 기도실에서, 하나님과 마치 면대하듯이 미주알고주알 구성지게 기도하고 찬양하는 걸 봤다. 얼핏 들어본 내용은 학생회의 상황들을 아뢰고 있었다. 그리고 기도하며 훌쩍거리고 있었다.

   은도의 교복은 나와는 달랐다. 짐작하기로는, 낮에는 알바를 하고 밤에 학교에 다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선배나 동료, 후배들을 대차게 잘 이끌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내게는 큰 바위 얼굴 같은 존재였다. 은도가 맞다고 하면 맞는 것이라고 믿을 정도로 존경하게 되었다. 은도는 내 인생의 멘토였다.      


   어느 날, 은도네 집이 부산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서 교회에서 송별회가 있었다. 나의 눈물보가 터지고 말았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서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그때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렸을 것 같다.

https://youtu.be/FWNUxTEDHBg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훈계로써 인도하며 도와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때까지 계심 바라네.


 그날 불렀던 찬송은 부를 때면 어김없이 은도 생각이 났었다. 살면서 때때로 은도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수소문을 해볼 요량도 못해보고 후루룩 한 세상을 보내고 말았다. 보나 마나 멋진 남편을 만나서 아이들 잘 키우며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한 번 보고 싶다.'   


  혼잣말을 때로 되뇌곤 했다. 허겁지겁 살아오다가 헤어진 지 35년도 더 지난 어느 날, 은도를 다시 만났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기막힌 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아들이 포항에 있는 한동대학교 교내에서, 자전거에서 넘어져 대형 사고를 당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실낱같은 희망 하나만 가지고 있던 때였다. 포항에 살고 있었던 은도가 나의 소식을 누군가를 통해서 전해 들었던 모양이다. 그리운 은도를 만나서 참 좋았지만 적어도 그때는 아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때다. 아들과 함께 여차하면 모든 걸 내려놓겠다는 맘까지 들던 시절이었으니...

  은도는,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스토리가 담긴 책과 먹거리를 들고 틈틈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즈음에 나는, 거의 실성한 사람 같아서 내 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은도를 참 좋아했고 헤어지던 날 얼마나 울었는지에 대한 얘기 따위는 꺼내지도 못했다. 아들이 몇 차례 대수술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수술실 밖에서 은도는 나와 함께 있었다. 한 사람의 존재가 때로는 언덕처럼 따사로웠다. 은도와는 오랫동안 연락 한 번 하지 못하고 지냈건만, 내가 쓰러지려는 순간에 천사처럼 내 곁에 와 있었다. 은도는 천사였다.


  아들은 생명은 건졌으나 기약 없는 병상 생활을 예고하는 상태가 되었다. 아예 휴직을 하고 아들의 간병만을 위해서 포항에서 지냈지만 6개월 만에 주거지인 인천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긴 마라톤처럼 아들을 품고 인생의 경주를 하기로 했다.


"우리 몸에 혈압이나 성인병이 오면 약물 등으로 몸을 관리하며 평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가정에도 그런 것이 온 것이라 여기며 상황을 잘 끌어안고, 품고 가셔야 합니다."


  정신과 의사가 내려준 처방이었다. 약물의 도움도 받고 힐링하며 머리를 식혀야 한다고도 했었다. 고무줄을 계속 당기면 끝내는 터지는 것처럼 번 아웃되어 쓰러진다고도 했었다. 그래서 잠시 살았던 포항을 떠나기로 했다. 그날, 은도는 산딸기를 사 들고 왔었다. 마침 산딸기가 먹고 싶었던 때였다. 해마다 6월이 되면, 종이컵으로 하나 정도의 산딸기를 사 먹는 별다른 습관이 내게 있었다. 산딸기가 먹고 싶었던 그 순간에 온 은도는 천사가 맞다.


산딸기 연가♩♪♬

[은도가 사 왔던 산딸기]

이루지 못한 사랑을 떠나보내던 날

담장에는 6월의 장미가 불타고 있었고

괜스레 산딸기 한 알을 입에 넣고 싶었다

그날 먹지 못한 그 산딸기는

해마다 6월이 오면

생각났다.


가야 할 때 가버린 사랑이

먼 길 돌아와서 보니

축복이었다


올해 나는, 6월에

산 딸기를 먹었다

후배 은도

내 맘을 알기나 한 듯이

터질 듯 앙증맞고 먹음직스러운

산딸기를 들고 왔다.


8개월간 의식 없는 아들의

찬란한 눈망울은,

"절망하지 마세요"라고

산딸기 빛깔로 빨갛게

외치고 있었다


  일전에 한 후배가 은도 남편의 부고를 알리는 문자를 보내왔다. 아, 은도의 프로필 사진에서 남편분과 하이킹하며 지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이제부터 은도는 어떻게 살지? 은도는 또다시 하나님께 미주알고주알 구성진 기도와 카랑카랑한 찬양으로 여생을 보낼까? 맘이 자꾸 그곳에 가 있다. 그러나 은도는 잘 살 것이다. 어느 부흥사님이 지어주셨던 참 좋은 이름, 은도(은혜로운 길)니까...

[은도가 보내온 메시지]

  코로나 상황도 그렇고 형편상 문상을 갈 수 없었다. 맘을 추스르고 은도에게 살며시 애도를 표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은도가 고맙다고 했다. 그런 와중에 답장을 보내오는 게 오히려 슬펐다. 맘을 담은 봉투를 온라인으로 보냈다. 또 한 번 고맙다는 답이 왔다. 그리고 부의금은 받지 않았다.(카뱅으로 보냈다.) 마치 젠가 게임을 하며, 뺄 것은 빼고 밀 것은 미는 기분이 들었다. 맘은 받고 자기 맘도 전하겠다는 의도였다. 아들을 10년이나 돌보고 있는 나의 부의금은 받지 않겠다 뜻 이리라.

  은도의 마음이 진정되었을 즈음에, 부고를 알려주었던 후배에게 은도의 계좌 번호를 알아내어 부의금을 보냈다. 그랬더니 잠시 후에 입금을 알리는 메시지가 울렸다. 상을 치른 후에, 마음에 작정하고 있었던 부분이 있었는지 상당액의 후원금을 보내왔다. 은도는 내게 큰 사람이다. 미안했다.



 곰곰이 생각을 가다듬었다. 어디든지 훌훌 가방 하나 고 나다니라는 의미로 고급형 쇼퍼백을 '선물함'으로 보냈다. 이번에는 은도가 내 맘을 접수했다. 


언니~

귀한 맘 고맙게 받을게요.

불끈불끈 힘이~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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