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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자에게 줌인하다

- 독창회를 다녀와서

by Cha향기

시댁과 친정에 조카가 여럿 있지만 서로 사느라 바빠 왕래가 뜸했다. 집안 경조사가 있다면 겨우 스치듯 얼굴이나 볼 정도였다.


친정 여동생의 딸내미 oo가 아이를 둘 낳은 줄은 알고 있었다. 어느 날, oo가 많이 안 좋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 소리를 전해 들으니 잠시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큰 애가 겨우 유치원에 들어갈 정도인데 어쩌다가 그런 일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난해 10월쯤이었다. 광주에서 올라와 서울 원자력 병원에서 수술받고 정밀검사도 진행한다고 했다. 열일을 제쳐두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인천에서 가긴 가장 먼 서울이었다. 원자력 병원은 서울 하고도 맨 끄트머리 북쪽이었다. 수술을 앞두고 환자복을 입은 조카를 마주하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수술실에 환자를 들여보내고 있는 동안 보호자의 무너지는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 익히 경험하여 잘 안다. 그래서 그 시간을 조카사위와 함께 보내고 싶었다. 서로 아무 말하지 않더라도 함께 고통을 나누면 절반이 될 수 있을뿐더러 숨이라도 쉴 수 있을 터였다. 조카사위와 함께 대기실에 있었다. 전광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대부분 50대/60대/70대인 환자 명렬에 조카만 30대 초반이었다. 그것만 봐도 맘이 많이 아팠다. 제발 별일 없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기도했다. 내 기도가 생명의 주관자인 하나님께 닿기를 간절히 바랐다. 억겁 같이 느껴지는 시간을 보냈다.


왜 진작에 자주 연락하며 지내지 못했을까? 조카 oo의 맘 속에 어떤 스트레스가 있었던 걸까? 어쩌다가 이런 지경이 됐을까? 혹시 일이 여차하면 그 어린아이들을 어떡하지? 별의별 걱정이 밀려왔다. 아, 그런데 다행히 수술도 잘 됐고 정밀 검사 결과가 악성이 아닌 것으로 나왔다. 토끼 용궁 갔다 온 기분이었다. 이 좋은 소식을 가족 단톡 방에 올리니 숨죽이며 기도하던 가족들이 모두 기뻐했다. 절망의 끄트머리에서 희망을 찾은 조카였다. 아무쪼록 몸 관리 잘하여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지난주에 조카 oo에게서 별안간 연락이 왔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청라국제도시'에서 독창회가 있는데 자기가 반주를 한다고.


"이모, 시간 나면 오세요."

라고 했다.

"가야지, 내 조카가 반주하는 독창회는 꼭 챙겨 봐야지."


일정을 조정하여 그 독창회에 참석하기로 맘먹었다. 독주회가 열리는 아트 센터에 가는 동안 조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반주자


반주자의 삶이란?

자신은 드러나지 않고 스타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이다. 노래하는 자를 위해 섬기는 역할이었다. 게다가 자기 혼자 열심히 잘 연습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노래하는 자와 호흡이 맞아야 하는 것이며 노래하는 자의 템포와 감정을 살펴 그야말로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빛나고 싶어 한다. 남을 빛나게 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반주자의 삶은 참 고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아노를 전공했지만 조카는 심적으로 힘이 들어 이런 자리를 손사래 쳤었단다. 그런데 조카의 재능을 익히 잘 알고 계셨던 교수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이 일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콜라보와 하모니는 잘 이루어지면 시너지 효과가 나지만 조금만 흐트러져도 상호에게 먹칠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조카가 들고 있는 반주 파일을 보니 수많은 음표들이 빼곡했다. 16분 음표까지는 들어봤지만 32분 음표라는 것도 있을 것인데 그 음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어낸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셋 잇단음, 다섯 잇단음, 일곱 잇단음이 가득한 악보를 어떻게 연주해 낼까? 그 미묘한 길이와 높이를 구분해야 하는 손놀림에 한 치의 오차도 용납되지 않을 텐데... 리사이틀이 시작되기 전부터 오히려 내가 떨렸다.

처음 독창회가 시작되자 내 눈은 반주자에게로 향했다.


독창회가 바아흐로 시작됐다. 첫 음이 눌러질 때 전율이 일었다. 조카가 피아노 음에 맞추어 얼굴 표정을 지으며 몸을 움직이는 미세한 모든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숨 막히고 긴장될지 알기에 내 손에 땀이 났다. 나는, 한 음이 삐끗한다고 해도 눈치채지 못할 음악에 둔한 사람이다. 근데 본인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이 일을 협연해야 하니 긴장이 극도였으리라.


한곡 한곡 마무리 될 때마다 고개를 넘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조카는 이모가 관중석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많은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각 장이 끝날 때마다 소프라노와 반주자가 함께 인사하는 장면이 있어서 마음이 좋았다. 그런 장면이 반주자의 존재를 알리는 듯했다. 그날은 유난히 반주자가 돋보였다.


조카가 그날 반주해야 하는 곡이 16곡이나 됐다.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작곡가들의 명곡을 혼자서 하는 독주가 아니라 독창하는 분의 반주를 한다는 게 내게는 넘사벽의 일로 보였다. G. F. Händel / A. Beach / C, Debussy / G. Puccini / R. Strauss / 윤이상 /김 홍 / V. Bellini 이런 분들의 곡이었다. 조카사위 말로는, 그중에 Richard Strauss의 곡이 무척 어렵다고 했다. 그것 때문에 반주하기를 한참 꺼려했단다. 그 꼭지를 넘으니 나도 안도의 숨이 쉬어졌다.


성악가의 연주도 감동이었다. 그 많은 곡의 원어를 어떻게 다 외울 수 있을까? 반주자와 호흡하며 정확하게 부를 수 있을까? 아름다운 독창회 이면에는 성악가님의 피를 토하는 연습이 있었을 것 같았다. 부르는 곡이 더해질수록 관객과 라포가 형성되어 박수 소리는 더 커졌다. 생면부지의 성악가님이지만 멋진 연주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멋진 노래가 공연장을 꽉 메웠다. 듣는 내내 천상의 목소리, 세계적인 스타, 조수미님이 떠올랐다. 이 성악가님도 차세대에 손꼽힐 성악의 주자가 될 것 같았다.


참 색다른 경험이었다. 나는 <뉴욕 브로드 웨이>에서 뮤지컬을 감상한 적 있고 <예술의 전당>에서 오페라를 본 적이 있다. <세종문화예술회관>에서 뮤지컬을 감상하기도 했다. 솔직히 그럴 때 반주에 대해 신경을 1도 기울여 본 적이 없다. 화려한 주인공에게만 시선이 갔다. 알고 보면 그런 공연 배후에는 반주자는 물론 수많은 스태프들이 숨어서 땀을 흘리고 있는데 우린 대체적으로 무대 중앙만 바라보게 된다.

[반주자와 성악가/ 성악가, 교수님, 반주자/ 독창회 티켓]


공연 전에 독창회 장면을 카메라로 찍지 말라는 광고가 있었다. 공연에 방해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휴대폰을 의자 밑에 넣고 녹음하듯 몇 장면을 찍었다.

공연이 끝나자 대부분 성악가 쪽으로 우르르 몰렸다. 여러 개의 꽃다발이 성악가에게 전달되고 사진 찍는 시간이 오래오래 지속됐다. 이윽고 반주자와 성악가와 독창회를 주최하신 교수님과 함께 사진 찍는 시간도 있었다. 이런 멋진 독창회를 단 한 번의 리사이틀로 끝나는 건 무척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카가 살고 있는 광주에서 다시 한번 독창회를 개최해 보면 어떨까? 그렇게 조카가 한 번씩 반주의 무대에 섰으면 좋겠다. 그 좋은 실력을 땅에 묻어 둬서는 안 된다고 본다. 새 정부에서 외치는 K-컬처 육성에 힘입어 이니셔티브 한 음악인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내가 꽃다발을 준비해 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 후회로 밀려왔다. 미처 그 생각을 못했다. 이제 앞으로는 조카가 반주한다고 하면 꽃다발부터 챙겨야겠다. 한 시간 반 정도 숨죽이며 건반을 하나하나 두드린 그 손을 꼭 축복하고 싶었다. 손가락이 저렸을 것 같다. 감각이 없었을 것 같았다. 반주를 잘하고 내려온 조카가 다시 보였다. 사람마다 달란트가 다르다. 조카의 달란트는 피아노 연주였다. 건축을 하거나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글을 쓰는 사람도 있다. 그중에 반주하는 사람의 재능이 더없이 대단해 보였다. 조카가 조카로 보이지 않고 존경스러운 음악인으로 보였다. 그날로 조카의 1호 팬이 되기로 했다.


조카가 반주한 독창회에 다녀오니 괜스레 조수미 독창회 영상을 보고 싶었다. 조수미님만 보지 않고 반주자를 눈여겨봤다. 앞으로는 성악가와 반주자를 함께 볼 것이다. 아니, 반주자에게 줌인할 것 같다.


https://youtu.be/Nk-OxVOlZkw


화려한 무대에서 투명인간처럼,
묵묵히 반주자로 섬기는 사람이 있다.

그들을 챙겨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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