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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백수 일지(3/3부)

- 가쁜 하루

by Cha향기

나의 백수 일지(1/3)

나의 백수 일지(2/3)


25년 7월 00일, 날씨: 오락가락, 지 맘대로~
이 글은 하루치, 나의 백수 일지다.



아침부터 여러모로 바빴다. 또한 야간에 해야 할 일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저녁 산책을 내려놓을 수 없다. 올해, 건강 검진을 받아야 한다. 정상 판정을 받으려면 건강 관리를 미리 해야 한다. 현재 상태로 검진을 받으면 '전문 의사와 상담'이라는 결과를 받을 게 뻔하다. 그래서 내가 목표로 하는 내장 지방, 체지방, 몸무게 수치로 만든 후에 건강 검진을 받을 계획이다. 인바디 앱에 8년 간, 나의 건강 측정 보고서가 기록되어 있다. 인바디 박사는 언제나 허풍을 많이 떨며 여러 가지 조언을 해준다.


최근 며칠간 변화가 크지 않았으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 체중이 줄고 체지방도 변화하는 모습입니다. 근육 발달형에게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습니다. 올바른 생활습관과 식이 요법 및 운동을 꾸준히 병행해야만 건강과 탄탄한 몸매를 잘 유지할 수 있어요. 매일 근력+유산소: 삼두근 팔 굽혀 펴기+해머 컬-덤벨+마운틴 클라이머를 꾸준히 하세요.(최근 내 측정치를 보고 인바디 박사가 말해준 분석 멘트)


저녁 식사 후에 설거지는 식세기 이모에게 부탁하고 일단 밖으로 나간다. 식후에 앉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어슬렁어슬렁 산보를 한다. 걸어가며 우리는 누군가의 뒷담화를 하며 낄낄대거나 콧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그 산책길 중간쯤에 이름 없는 미니 공원이 있다. 다들 그냥 지나치는 곳이다. 우리도 한 동안 그랬으니까. 그러나 그 공원을 꼼꼼하게 챙겨보면 꽤 아름답다. 자세히 보아 알아낸 곳이다. 바로 숨은 명소다. 우리에게 딱이다. 그곳을 산책길 반환 지점으로 정했다.

[미니 공원에 있는 팔각정/ 팔각정 앞에 핀 금계국과 개망초]
[팔각정에서 본 석양 뷰/ 매일 걷는 산책길]

그 공원 한가운데는 팔각정 정자가 멋지게 세워져 있다. 그곳에 신발을 벗고 올라앉으면,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사랑이로구나!"라고 남편은 큰 소리로 중중모리 장단 한 곡을 한다. 그런 걸 보면, 남편은 삼국, 고려, 조선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한량이나 했을 것 같다. 첨단 시대에 헉헉거리며 사는 그가 안쓰럽다. 시대를 잘 타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내가 쥐어준 접이 부채를 펼치며 관객 없는 판소리 한 판을 불러 젖힌다. 그러다가 자기가 부른 노래로 만든 브런치북에 실린 트로트를 구성지게 부르기도 한다. 맘껏 소리쳐도 상관없다.

금계국이 노란 물결을 이루는가 싶더니 어느덧 하얀 빛깔 개망초가 지천으로 흐드러졌다. 남편의 노랫소리에 이름 모를 새가 반주를 한다. 아무도 얼씬 거리지 않는 곳이라 우리에겐 안성맞춤 공원이다.


"이거, 우리 별장이라고 하자." 내가 밑도 끝도 없이 제안했다.

"그러지 뭐."

우린 계약서도 쓰지 않고 별장 하나를 얻어 걸렀다. 신발을 벗고 들앉는 곳인데 매일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다. 어지럽히는 자가 없으니 청소도 간단한 듯했다. 우린 대체로 5~ 6시경에 저녁을 먹는데 이른 편이다. 퇴근하는 차들이 미니 공원 옆 2차선 샛길을 이용하여 간간이 지나간다. 그 정자에 앉아서 하늘 위를 달리는 구름을 보며 멍을 때린다. 때로는 산안개가 끼었다 말았다 하는 모습을 하릴없이 지켜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하루치 빛을 몽땅 쏟아낸 해님이 산을 넘어가는 순간을 상념에 젖어 바라보기도 한다.



강아지 산책시키러 나온 분들이 산책길을 지나간다. 산책 나온 강아지들은 대체로 신나 있고 주인들은 강아지를 뒤쫓아 가느라 헉헉댄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러 나온 핑계로 강아지 주인들이 오히려 운동하는 것 같다.


"당신이 내 강아지 하세요. 내가 나오기 싫을 때는 강아지 산책 겸 나간다 하려고요."

"아니지, 당신이 내 강아지 해야지. 당신은 매일 뛰잖아. 강아지는 뛰니까." 남편의 말에 빵 터졌다.

"푸하하, 그러네요. 내가 당신 강아지 해야겠네요."

남편이 나더러 강아지역을 맡으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 재활의학과 전문의는 23년째 마라톤 풀코스를 30번이나 뛰었다고 했다. 그분의 말에 의하면, 하루에 단 5분이라도 뛰면 면역력이 좋아진다고 했다. 그런 사람은 병에 잘 걸리지 않지만 병에 걸려도 치료 기간이 단축된다고 했다. 그래서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슬로 조깅을 한다. 매일 10분 정도 뛴다. 힘이 들지 않으나 땀은 날 정도다. 그래서 남편보다 내가 산책길 강아지가 되라는 말이다.


머리 탈모부터 발톱 무좀까지, 온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데가 없는 남편은, 내가 그렇게 뛰는 걸 부러워했다. 자기는 아킬레스근 때문에 주사를 맞고 있는 중이고 척추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그 정도로 천천히 뛰는 것조차 엄두를 내지 못한단다. 기초 체력이 다져지면 그때는 슬로 조깅을 하겠다나?




하필, 아들을 돌보는 활보샘이 결근을 하여 그날 야간 간병이 내 차지였다. 그래서 다른 날 보다 더 일찍 저녁을 먹고 산책길에 나섰다. 그런데 그 공원 안 쪽에 부부가 앉아 있었다. 본 적이 없는 분들이다. 우리도 그날은 햇빛이 많이 남아 있어서 곧바로 팔각정 정자에 앉을 수 없었다. 그늘막 있는 벤치에 앉았다. 그런데 무단 침입자인 두 분이 뭔가 작당을 하고 있는 낌새였다. 그러려니 하며 우리는 벤치에서 시간을 보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팔각정으로 옮겨가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 부부는 길 건너에 세워둔 자동차에서 애완용 토끼 한 마리를 안고 나왔다. 토끼를 풀밭에 내려놓더니 남자가 토끼를 발길로 찼다. 조그마한 토끼가 학대를 당하고 있는 것 같아 불쌍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휴대폰을 보며 그분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더니 갑자기 그분들이 급한 걸음으로 차에 올라탔다.


"어? 저 사람들이 그냥 맨 손으로 가네. 토끼는 어쩌고?"

매의 눈을 가진 남편이 언제 그 사람들의 손을 봤을까?


"그렇다면 토끼가 풀밭에 있어야지요." 풀밭에는 토끼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게, 그것 참 이상한 일이네?"

그 부부는 차 시동을 걸자마자 곧바로 달아났다. 우린 뭘 본 걸까? 토끼는 어디로 갔을까?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내가 한 번 가볼게요." 그분들이 토끼를 데리고 있었던 곳은 정자에서 열 걸음도 안 된다. 그 주변으로 가봤지만 기척이 없었다. 무슨 일이지?

"토순아~ 토순아~" 내가 큰 소리로 불러도 풀숲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이번엔 남편이 나섰다.

[토끼의 모습이 약간 보인다.]

"내가 찾아볼게. 그 사람들이 토끼를 버리고 간 모양이야. 토길아~ 토길아~"

헉, 토끼의 이름이 그단새 토순이에서 토길이로 바뀌어 있다. 그나저나 토끼가 뛰쳐나온다 해도 걱정이다. 우린 애완동물을 키우지 않는데 토끼가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앵겨 붙으면 어쩌지? 걱정 아닌 걱정이 됐다.


남편이 이곳저곳의 풀을 흔들어 토끼를 찾았다. 나도 남편 뒤를 따랐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혹시? 그분들이 토끼에게 수면제를 놨을까? 아니면 극약을 먹였을까? 오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여기 있네."

아, 남편의 그 말에 머리가 쭈뼛 섰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한 번 찍어두자. 나는 카메라 포커스도 제대로 맞추지 않고 사진부터 찍었다. 토끼털이 약간 보이긴 했다. 찍은 사진을 확대하여 볼 용기가 없었다. 토끼는 자는 걸까? 혹시 죽은 것일까? 유기 토끼를 볼 줄이야. 아, 우리 앞에서 주인에게 버림받고 생명이 끝난 토끼라니... 토순이든 토길이든 그건 중요치 않고,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토끼야, 미안해.




토끼에 대한 의문을 잔뜩 안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나는 천천히 뛰며 먼저 집에 당도했고 남편은 뚜벅뚜벅 걸어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집안 정리를 했다. 다른 때라면 글을 좀 쓰다가 잠자리에 들면 하루 일과가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야간 근무가 남아 있었다. 밤샘할 짐을 챙겨 아들이 있는 본가로 갔다. 낮에 다녀왔는데 그것도 모자라 하루에 두 번이나 갔다. 종종 그럴 때가 있다. 오죽하면, 월 15회 이상 대중교통을 이용한 경우 대중교통 이용액 중 일부를 적립하여 주는 K-패스 카드를 발급했을까.


야간 근무를 했던 지난 일이 떠올랐다. 꽤 오래전이다. 아들이 입원했던 6년간은 금요일마다 병원으로 퇴근했었다. 간병인에게 매주 한 번씩 유급 외출을 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동료 N샘이, 아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 근처에 갈 일이 있다면서 나를 태워주곤 했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N샘은 그 근처에 있는 댄스 학원에 다녔다. 내게 차마 댄스 학원 다닌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단다. 누구는 야간 간병하러 가고, 누구는 춤추러 가고? 좀 그렇긴 하다.


병원에서의 야간 간병은 그야말로 뜬 눈으로 새야만 했다. 8명의 환자에 보호자 8명이 한 병실에 있으니 밤새도록 돌아가며 쿨럭거리고, 뒤척이고, 이를 갈기도 하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하룻밤을 지내고 나면 10년이 늙는 기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졸음이 쏟아져 내릴 역을 놓친 적도 몇 번 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아들이 있는 본가, 쾌적한 황토방에서 아들과 하룻밤 보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아무튼 아들이 잠을 잘 자느냐 못 자느냐에 따라서 야간 간병의 힘듦이 차이가 난다.


본가에 들어가니 교대하는 활보샘이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잠들었어요."라고 했다. 내 근무는, 밤 10시에 시작하여 아침 6시에 오전 근무하는 활보샘과 교대하면 끝난다. 아들은 다른 날에 비해 늦게 잠들었으니 왠지 밤을 잘 보낼 것만 같았다. 아들 옆에 마련된 보호자용 황토 침대에 누우니 온몸이 노곤노곤했다. 눕기만 해도 피곤이 확 풀리는 느낌이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천정을 바라보며 지나온 세월을 더듬어 봤다. 13년이란 세월을 마라토너처럼 달려왔다. 힘들고 지난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아들은 도대체 어느 하늘 아래 있는 걸까? 살아 있는데 이 세상에 있는 우리랑 소통이 되지 않다니... 3층천(heaven)에 있는 걸까? 의학적으로나 영적으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육신은 가지고 있으나 육신으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아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고, 엄마를 알아보지도 못하다니. 이런 경우를 성경에서도 본 적이 없다. 38년 된 중풍 병자나 열두 해 동안 혈루병을 앓았던 여인,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에 대한 얘기는 있다. 아무튼 아들과 같은 경우를 본 적이 없다.

하루 세끼 먹는 약만으로도 배가 부를 것 같다. 그 약을 장기 복용하고 있으니 간은 온전할는지? 약 후유증은 없는지? 약의 효능은 있기나 하는 건지?


아들 곁에 있으니 당장에 별의별 걱정이 다 된다. 그런 걸 봐도, 세컨 하우스에서 아들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 우리 부부가 잠시라도 아들 걱정을 덜 할 수 있다.


아들은 소변도 누지 않고 깊은 잠에 떨어졌다. 애들 말로 개이득이라고 생각하며 막 눈을 붙이려 하는데 아들이 깊은 한숨을 쉬며 뒤척인다. 그러더니 폭포 소리 같이 쏴아 하는 소리를 내며 소변을 눈다. 다시 새벽까지 자겠지,라고 생각했다. 아,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때부터 아들이 입을 쩝쩝거리며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시장기가 도는 모양이었다. 늘 배고픔과 전쟁이다. 한 끼에 400ml 정도 경장 영양식을 투여하니 돌아서면 배가 고픈 모양이다. 그렇더라도 식사량을 늘려 줄 수 없다. 누워있는 환자는 살이 찌면 대책이 없다. 그래서 항상 식사 조절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배고프다고 쩝쩝거릴 때가 제일 맘이 아린다. 그것도 밤 12시에 잠에서 깨어 저러고 있으니 새벽까지 아들의 저항이 이어질 듯했다. 아들은 발을 덜덜 떨며 괴로움을 표했다. 입을 쩍 벌리고 하품도 연신 해댄다.


그랬구나. 수많은 밤을 이렇게 너는 괴로워했구나. 엄마, 아빠가 꿈나라에 있을 때, 우리 꿈에 왜 찾아오지 않나 했더니 이러고 있느라 꿈길에 못 왔구나. 코끝이 시큰해진다. 밤 열두 시에 13년 차 중증환자 아들 앞에서 눈물을 떨구고 있는 부모가 이 지구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여 아들을 어루만지기만 했다. 시간이 참 느리게 갔다. 날이 새려고 하니 아들이 이윽고 조용해졌다. 결국 배고픔에 진저리 치다가 그예 지쳐 잠이 들었나 보다. 오히려 그때쯤이면 깨야 하고, 면도하고 세수해야 하는데... 사타구니도 닦고 체위도 한 번하여 식사할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아들이 입을 벌리고 잔다. 푹잠 중이다. 단 5분이라도 더 재우려고 참고 참았다.


때로는 먹는 것보다
자는 게 더 맛있을 때가 있으니까.


#유기 토끼

#산책길

#야간 간병

#팔각정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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