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걸리 술빵
고향, 그 옛집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동구밖에서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이 삼돌이 아재 댁이었고, 그 담장 너머에 우물이 있었다. 골목 사람들은 그 우물물을 길어 먹었다. 집안에 펌프나 수도 시설이 없던 시절이었다. 골목 오른편은 묘산걸 댁 담장이었다. 묘산걸 댁 감나무는 담장을 훌쩍 넘을 정도였다. 그 그늘은 골목길을 다 덮었다. 여름이면 조무래기들이 감나무 그늘 밑에 옹기종기 모여 놀았다. 우물 곁엔 미나리꽝이 있었고, 그 옆이 개터 아재 댁이었다. 그 집은 대문이 없어서 집안이 훤히 들여다 보였으며 마당은 무척 넓었다. 우물을 지나 개터 아재 댁을 지나면 오른편에 우리 집이 있었다.
우리 집 대문 밖에는 양철문이 달린 변소가 있었다. 처가와 변소는 멀수록 좋다고 말하던 때다. 대문을 열고 나와 네댓 걸음 가다가 돌계단을 두어 개 올라가면 용변을 볼 수 있게 만든 타원형 구멍이 있었다. 혹시 그 구멍에 빠지면 죽는다는 생각에 벌벌 떨었다. 서향(西向)이라 여름 오후에는 땀이 삐질삐질 나던 곳이었다. 가로등이 없어서 밤엔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래서 누군가와 함께 변소에 가야 했고 그 누군가는 변소 밖이나, 개터 아재 담벼락 밑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변소 안을 향해 이야기를 나누며 기다려 주었다. 우리 변소 아래 부분은 다른 골목에 있는 흰바우 댁 변소와 인접했다. 말하자면, 우리 변소와 흰바우 댁 변소 출입문은 정반대에 있었지만 푸세식 뒷간은 서로 가까웠다.
우리 집 왼편과 개터 아재 담장 사이로 시궁창 물이 흘렀다. 골목 안 사람들이 설거지하고 버린 물이다. 시궁창 가에는 달개비와 강아지똥풀이 자랐다. 다른 들풀과 이름 모르는 꽃이 피기도 했다. 우리 집이 좁아서 꽃밭 따윈 없었다. 대신 시궁창에 핀 꽃이 때론 한몫했다.
우리 집을 지나면 왼편에 5촌 당숙 아재 댁인, 큰집이 있었다. 큰집 앞마당과 개터 아재 뒤란은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큰집을 지나면 골목 막다른 맨 끝 집, 울라꾸네였다. 울라꾸네는 윗마을 솔악골에 살다가 판득이네가 살던 그 집으로 이사 왔다. 그래서 울라꾸네는 우리 동네 사람들과는 데면데면하게 지냈다. 큰집 대문에서 직진으로 좁은 길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원촌 할매 댁과 나대실 할매 댁이 있었다. 원촌 할매네와 나대실 할매네 사이 정지간 앞에서 나무 쪽문만 열면 한 집처럼 서로 오갈 수 있었다. 나대실 할매네는 우물이 있어서 골목 우물에 나올 필요가 없었다. 그 우물은 원촌 할매네도 사용했다. 서로 형제지간이니까 네 것 내 것 없이 지냈다.
큰집은 뒤란이 넓어서 텃밭도 있었다. 그 텃밭에는 부추와 생강이 자랐고 때때로 보랏빛 도라지 꽃도 피었다. 큰집 본채는 유난히 높았다. 아랫채에는 사랑방과 곁다리 방이 있었다. 사랑채와 그 옆방은 대나무살을 엮어 만든 문짝에 창호지를 바른 문이었다. 사랑채 앞 쇠죽솥에 불을 지피면 사랑채와 곁다리 방까지 동시에 뜨끈해졌다. 방구들을 아예 그렇게 깔았던 모양이다.
사랑채 맞은편에는 소우리, 돼지우리, 닭장, 그리고 벼를 보관해 두는 한뎃 뒤주가 있었다. 큰집은 넓고 컸다. 큰집 변소는 우리와 달리 대문 안에 있었다. 큰집 할아버지는 우리 할아버지의 형님이었다. 큰집은 전답도 많았는데 게다가 앞산도 큰집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은 초가삼간이었고 마당은 폴짝 뛰면 한걸음 넓이 밖에 안 될 정도로 좁았다. 할아버지끼리 형제지간인데 살림살이에 차이가 많이 났다.
큰집 육촌 동생, 차정숙은 나보다 대여섯 살 아래였다. 육촌 동생 정숙이의 목에는 가로로 선명한 주름이 세 개 있었다. 첫 번째 주름엔 나는 욕심쟁이다, 두 번째 주름에는 나는 사납다, 세 번째 주름에는 까불지 마라,라고 적어 놓은 듯했다. 욕심 많고, 사납고, 호기롭기까지 했던 정숙이는 먹을 것이 있으면 꼭 골목에 나와서 먹었다. 그것도 우리 담장 바로 밑에서 냄새를 풍겼다. 담장 너머에서 나는 냄새로, 우리는 정숙이가 뭘 먹는지 알아냈다. 정숙이 손에는 옥수수, 쑥버무리, 감자, 고구마 등이 들려 있곤 했다. 때로는 대구에 살던 오촌 아재가 사다 준 눈깔사탕이나 산도 과자도 들고 나왔다. 왜 정숙이는 골목에 나와서 그런 걸 먹었을까? 자랑하려고? 누구 약 올리려고?
정숙이가 가장 많이 들고 나왔던 게 감자떡이었다. 감자떡은 감자 썩은 부분을 물로 여러 번 씻어 말려 가루를 내고 이 가루를 더운물로 반죽하여 만든다. 큰집은 밭이 많았으니 감자도 많았고, 감자가 많으니 썩은 감자도 많았다. 그 흔한 썩은 감자가 우리 집엔 없었다. 그러니 감자떡은 언감생심이었다.
우리가 엄마한테 감자떡, 감자떡, 이라며 졸라대니 엄마가 만들어 주신 것이 막걸리 술빵이었다. 이스트를 넣고 부풀린 반죽을 찜틀에 넣어 찌는 빵이다. 찜기 물솥 테두리는 밀가루 반죽으로 잘 발라주어 김이 새나가지 않게 한다. 흙바닥 정지간에서 불을 때서 빵을 쪄야 했으니 몹시 복잡스러웠다. 막걸리 술빵에는 강낭콩을 넣었다. 막걸리 술빵은 걸뱅이빵, 거지빵, 비렁뱅이빵, 헐레버리빵이라고도 한다. 엄마가 쪄주신 술빵은 발효가 잘 되어 마치 스펀지 같았다. 간간이 보이는 강낭콩이 술빵 맛을 돋웠다.
"야~ 빵, 야~ 콩!"
막둥이 남동생은 막걸리 술빵을 '야빵'이라고 했다. 거기 넣은 콩은 '야콩'이라 했다. 야~ 큰 빵이다, 야~ 큰 콩이다,라며 좋아했다. 동생이 울어댈 때, "야빵 줄게, 야콩 줄게."라고 하면 금방 울음을 그치곤 했다.
육촌 차정숙은 때때로 두 팔을 벌려 막으며 골목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 억지를 막을 수가 없었다. 사실, 큰집은 막다른 골목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골목길을 이용할 일은 거의 없었다. 우리 쪽에서 두 팔 벌리고 길을 막으면 자기는 꼼짝없이 갇히는 신세가 되는데..... 정숙이가 그렇게 밉상을 부려도 우리 형제들 중에 어느 누구 하나 나서지 못했다.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다고 따지지 못했다. 우리는 하나같이 숫기 없고 내성적이었다. 남한테 싫은 소리 할 배짱을 아예 타고나질 않았다.
어느 날, 나대실 할매 댁에 심부름을 갔다. 정숙이는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꼼짝하지 않았다. 그때 남동생이,
"누부야, 야빵 줄게. 비켜주라."라고 했다. 남동생은 손에 들고 있던 술빵을 정숙이에게 건넸고 그제야 정숙이가 길을 터 주었다.
육촌 차정숙,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며 살까?
가끔 보고 싶다.
엄마가 만들었던 술빵 찌는 방식으로 빵을 쪄볼 엄두가 안 났다. 쉬운 방법으로 술빵을 만들어 보려고 레시피를 살펴보고 유튜브 영상도 찾아봤다. 그러던 중에 전기 압력밥솥으로 술빵을 찌는 법을 알아냈다. 게다가 요즘 전기 압력밥솥에는 '빵발효'라는 버튼과 '만능찜'이라는 버튼이 있었다. 심봤다,라고 외쳤다. 어찌하든지 편리한 것을 찾는 내 성향에 딱 맞는 레시피였다. 그런데 처음 해보는 것이라 망치게 될까 봐 레시피대로 했다. 그래야 실패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전기 압력밥솥으로 만드는 막걸리 술빵 레시피다.
- 볼에 설탕, 소금, 생막걸리를 넣고 잘 섞는다. (여기에 베이킹파우더를 약간 가미해도 된다)
- 밀가루는 체에 곱게 친 후 볼에 넣고 반죽한다.
- 계란도 잘 풀어서 섞는다.
- 내솥에 식용유를 바른 후에 미리 섞어둔 반죽을 넣는다. (코팅이 잘 된 밥솥은 식용유 바르지 않아도 됨.)
- '빵발효' 버튼을 누른다.(40분 소요)
- 발효가 됐으면 건포도나 팥 삶은 것 등을 취향에 따라 넣어 섞는다.
- '만능찜' 버튼을 누른다(20분 소요)- 이 단계를 세 번 반복한다.(총 60분 소요)
- 도마 위에 내솥을 뒤집어 술빵을 꺼낸다.
- 먹기 좋게 자른다.
이 방법으로 하니 빵 반죽을 5~6시간 동안 이불에 싸서 발효시키는 과정을 생략할 수 있어서 좋았다. 찜기에 올려서 찌는 번거로움이 없으니 더욱 좋았다.
세월이 갈수록 옛것이 그립고
입맛도 그렇다.
그러나 그때 먹었던 먹거리가
지금은
그때 맛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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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샘물이 수돗물로)이 바뀌어서 그렇다고
누군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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