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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머니와 그 아들이 도랑에서 만나면?

- 추어탕

by Cha향기


[추어탕]


엄마는 여장부였다.


"질부는 남자 장정 열 몫은 한데이, 항우장사가 따로 없네." 농사일을 억척같이 잘 해내는 엄마에게 집안 할머니가 했던 말이다.


"일을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요령으로 합니데이." 이렇게 대답하는 엄마는, 탈곡한 볏 가마니를 리어카에 여러 개 싣고 달렸다. 이웃 아저씨는 겨우 한 가마니 정도만 지게에 지고 나를 때.


엄마는 사업 수완이 좋았다. 엄마는 주로 신발 가게 운영을 하시며 연탄 대리점도 겸하셨다. 연탄을 실은 11톤 트럭이 3대나 들어와도 주문받은 마을로 가서 다 배달하셨다. 그런 일을 다 처리하다 보니 돈을 융통하는 능력도 대단하셨다. 어머니는 일수를 써가면서도 입금 처리를 제 때에 해내셨다. 그게 수완이라면 수완이었다.


신발 도매상에서 장사할 물건을 떼와야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분기 로터리에서 집 방향으로 들어오는 버스로 환승해야만 했다. 버스 기사는 많은 짐을 보는 순간 학을 뗐을 것이다. 혼자 들기에 무거운 박스를 서너 개씩 가지고 버스를 기다리던 엄마였다. 엄마가 분기 로터리에 애타게 서 있는 걸 직접 내 눈으로 본 적은 없으나 얘기로 들어 알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아름드리 짐을 들고 버스를 놓치는 엄마 모습이 실루엣처럼 간간이 아른거릴 때가 있다. 40대 중반, 젊은 엄마는 이를 악물고 어떤 버거운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러셨으니 깡시골에서, 우리 5남매 모두 대학 졸업을 시켰을 것이다.


엄마는 요리를 잘하셨다.

"너거 엄마는 큰 대사 칠 때, 많은 밥을 하더라도 밥물을 잘 맞춘데이." 할머니는 무심한 듯한 말투로 엄마를 칭찬하곤 하셨다. 겉절이나 나물 무침도 잘하셨지만 엄마가 담근 된장, 고추장은 그 맛이 일품이었다. 간장을 덜 빼고 된장만 추출하는 기술을 엄마가 고안해 내셨다. 어느 날, 그 레시피를 말씀하시도록 하여 녹음해 두었다. 실제로 그 레시피대로 된장을 담가 본 적도 있다.


"장모님은 돌아가실 때, 몇 해 동안 우리들이 먹을 된장은 꼭 담가 놓고 가셔야 합니데이. 이런 된장은 돈을 줘도 살 수 없으니까요."

엄마와 함께 살았던 셋째 사위가 농담 삼아 엄마한테 말하곤 했다.


엄마는 하다 하다 붕어빵 장사도 하셨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일독에 빠져 사셨던 엄마는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가만히 있질 못하셨다. 오빠 내외가 현직교사로서 교원대학원에 다녔을 때다. 손주를 돌봐주려고 오빠네 집에서 지내셨다. 그때 뜬금없이 학교 정문 앞에서 붕어빵을 팔면 딱이라고 하시더니 곧바로 붕어빵 장사를 하셨다.


"코 묻은 돈이 무서운 것이데이. 푼돈 무시하면 안 돼. 푼돈이 모여서 큰돈 되는 법이야." 엄마는 붕어빵을 판 돈으로 손주들에게 용돈을 주시거나 생활비에 보태 쓰셨다. 보아하니 수입이 꽤 짭짤했던 것 같았다.


그 이후에 딱히 하는 일이 없게 되자, 엄마는 미싱으로 옷을 만들거나 뜨개질을 하셨다. 엄마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힘든 모양이었다. 큰 일을 턱턱 해내셨던 엄마와 어울리지 않는 일인 듯했는데, 어라? 엄마에게 아기자기하게 여성스러운 일솜씨가 있었다니. 미싱으로 모시 블라우스를 만드셨다. 딸 셋과 며느리 둘, 그리고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모시옷을 만들어 주셨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뜨개질을 하기 시작했다. 나도 몇 개의 뜨개질 옷을 엄마로부터 받았다. 색깔 별로 여러 개를. 엄마가 만든 블라우스나 뜨개질 옷을 받아도 놀라워하지도 않았다.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20년 정도 지나고 나니 입을수록 그 옷에 정이 갔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엄마표 옷이라니... 엄마가 만들어 주신 옷을 입고 나가면 모르는 사람들도 한 마디씩 하곤 한다.


"아유, 너무 시원하시겠어요."

"친정 엄마가 만들어 주셨어요."

"어머나, 어머니가 솜씨가 좋으시네요."

"이런 꼼꼼한 일을 할 분이 아닌데, 의외로 잘 만드시네요."라고 나는 말하곤 했다.

폭염이 오면 엄마가 만들어 주신 옷을 슬며시 꺼내 입게 된다. 일단 그걸 한 번 입고 나면 다른 옷에는 손이 가지 않는다. 엄마표 옷은 착용감이 좋고 시원했다. 우리 몸 치수를 재지도 않고 눈대중으로 우리 몸에 딱 맞는 옷을 완성해 내셨다.


[모시로 만든 블라우스(핑크) / 속에 메리야스를 입지 않고도 입을 수 있게 촘촘하게 뜨개질한 옷(흰색)]


[하룻밤에 뚝딱 뜨개질 하신 옷(핑크)/ 무늬를 넣어 심혈을 기울여 뜨개질한 옷(민트)]




엄마도 엄마지만 오빠도 만만치 않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다. 오빠는 누가 봐도 재주꾼이다. 교장으로 정년 퇴임한 오빠는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낸다. 오빠는 고등학생 때 기타를 처음으로 접하더니 혼자 기타 치는 법을 익혀 지금은 달인 수준이다. 오빠는 드럼도 혼자서 배웠다. 또한 피아노도 독학으로 익혔다. 그래서 자녀들 결혼식에 직접 피아노로 반주하며 축가를 불렀다. 오빠는 하모니카도 잘 분다. 오빠는 밴드를 창단하여 보컬 담당을 맡기도 했다. 오빠가 단장으로 있는 그 밴드는 종종 위문 공연을 다닌다. 오빠는 지휘도 잘한다. 교회 성가대 지휘를 하기도 했고 지금은 성당 성가대 지휘를 맡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uHA9DQz2aY&list=RDauHA9DQz2aY&start_radio=1

[지휘하는 오빠]




그런 엄마와 오빠가 한데 뭉칠 때가 있었다. 비 내린 오후에 미꾸라지를 잡을 때다. 내가 중학생쯤이었으니 오빠는 고등학생, 엄마는 30대 후반 정도 됐을 것 같다. 그런 엄마와 오빠가 도랑에서 만나면 미꾸라지들이 벌벌 떨었다. 두 분이 도랑에 내려가기만 하면 미꾸라지란 미꾸라지는 다 잡았다.


내 고향은 가야산 자락에 있다. 가야산에서 흐르기 시작한 야성강에는 물고기와 다슬기가 많았다. 우리 마을 앞에 흐르는 시냇물은 묵촌에서 내려왔다. 그 시냇물은 흘러 내려가 야성강으로 합류했다. 엄마와 오빠는 마을 앞 시냇물보다는 솔악골이라는 윗마을에서 내려오는 도랑에서 미꾸라지를 잡았다. 그 도랑은 물이 그다지 맑지 않았다. 도랑은 조무래기들이 놀던 동구 밖 정자나무 아래로 흘러갔다. 그 도랑에 미꾸라지가 많았다. 미꾸라지는 일급수보다 약간 진흙탕인 도랑에 많았다. 사람들은 그 도랑에서 미꾸라지를 잡곤 했다. 그러나 겨우 몇 마리씩 잡긴 했는데, "에이고, 추어탕 끓일 정도가 아니네." 라며 잡은 미꾸라지를 길바닥에 쏟아 버리곤 했다. 그러면 미꾸라지는 이때다,라며 파닥거리다가 몸통이 모래 범벅이 됐다. 조무래기들은 그런 미꾸라지를 건드리며 낄낄댔다.


엄마와 오빠가 족대를 들고 양동이를 챙겨서 동구 밖으로 나서면 조무래기들은 큰 구경이나 난 듯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엄마가 족대를 잡고 오빠는 미꾸라지 몰이를 했다. 애들은 족대를 걷어 올릴 때마다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억새풀 사이에 미꾸라지들이 숨 죽이고 있어도 오빠는 촉으로 그걸 알아내어 발로 밟으며 몰았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엄마는 절묘하게 족대를 갖다 댔다. 그러면 숨어있던 미꾸라지들은 독 안에 든 쥐가 됐다. 엄마가 족대를 들어 올릴 때마다 여지없이 미꾸라지가 가득 들어 있었다. 백발백중이었다. 미꾸라지 몰이를 잘하는 것인지, 족대를 잘 갖다 대는 것인지? 두 사람의 합이 기묘하게 잘 맞았다.


"세상에, 미꾸라지 씨가 마르겠네. 억수로 잘 잡네." 지켜보던 마을 아재가 말했다.

"저거 쉬운 일이 아닌데, 모자간에 호흡이 잘 맞네."라며 다른 아지매가 말했다.

오빠는 발끝에 닿는 미꾸라지를 손으로 잡아 올리기도 했다. 오빠의 손재주는 그때부터 특출 났다. 미꾸라지를 잡은 날이면 엄마는 추어탕을 끓이셨다. 오빠는 엄마표 추어탕을 몹시 좋아했다.


엄마가 끓인 추어탕은 질리지 않는 맛이었다. 그것만 있으면 다른 반찬은 필요 없었다. 엄마는 우리 형제들 모임이 있다는 말이 들리면 추어탕부터 끓여 냈다. 큰 솥단지에 추어탕을 잔뜩 끓여놓으면 우리는 들며 날며, 시도 때도 없이 추어탕을 먹어댔다. 모임이 끝날 때쯤이면 추어탕도 바닥나곤 했다.


"추어탕은 소화제 인기라, 아무리 먹어도 탈이 안 나." 자녀들이 추어탕을 맛있게 먹고 있으면 더 먹으라는 뜻으로 엄마가 하시던 말씀이다.



엄마가 끓이던 추어탕을 먹고 싶어도 엄마표(경상도식) 추어탕을 파는 식당은 없었다.


"내가 퇴임하면 야심작으로 장모님표 추어탕을 한 번 끓일게요."

남편에게 그렇게 큰 소리를 쳐놨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미꾸라지를 손질할 일이 머리 무겁고 그걸 푹 삶은 후에 소쿠리에 거르는 작업도 예삿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추어탕 끓이기에 도전했다. 미꾸라지를 푹 삶아서 일일이 소쿠리에 거르는 일을 할 게 아니라 믹서기에 갈면 간단하지 않느냐고 엄마한테 물었던 적이 있다.


"그러면 안 돼. 미꾸라지 가시가 들어가면 국물이 검어져."

'아, 그렇구나. 그래서 엄마표 추어탕은 국물이 맑았구나.' 엄마의 지론은 반드시 미꾸라지 살만 발라내어 끓여야 된다, 였다.


검색해 보니 미꾸라지를 삶아서 살만 발라 팔기도 했다. 물론 미꾸라지를 삶아서 갈아 만든 제품은 흔했다. 아무튼 미꾸라지 살만 준비되면 추어탕 끓이기 90%는 해결된 셈이다. 그동안 징그럽고, 냄새나고, 번거로워서 추어탕 끓이는 일을 엄두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젠 그냥 된장국 끓이기 만큼 쉬울 판이다.


추어탕 끓이기 레시피다.


(1단계)

- 살아있는 미꾸라지에 소금을 뿌려 뚜껑을 야무지게 닫고 1시간 정도 둔다.

- 호박잎으로 박박 문질러 해감 한다.

- 잘 씻은 후에 30분 이상 푹 삶아 준다.

- 문질러서 살만 발라낸다.

- 물을 부어 쌀을 일듯이 가시만 발라낸다.

- 그렇게 미꾸라지 육수 준비를 한다.


(2단계)

- 얼갈이배추를 아삭할 정도로 데친다.

- 취향에 따라 고사리, 토란대, 대파를 넣어도 된다.

- 집 간장, 된장을 넣고 얼갈이 데친 것을 조물조물해 둔다.

- 미꾸라지 육수에 얼갈이 무친 것을 넣고 끓인다.

- 후추, 마늘, 맛술도 취향에 따라 넣는다.


(3단계)

- 마늘을 다지고, 일명 땡초라고 하는 청양고추를 홍, 녹색으로 다져 둔다

- 제피 가루도 준비한다.


이번에 추어탕을 끓일 때 1단계를 생략할 수 있어서 쉬웠다. 숙제처럼 추어탕을 끓이겠다고 맘먹고 있었는데 드디어 '친정 엄마표, 경상도식 추어탕'이 완성됐다.


[추어탕 완성]



"가을엔 추어탕이지!"라고 하며
남편이 엄지척을 날린다.

남편은
"매 끼 추어탕을 먹으라고 해도
땡큐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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