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제비
은도를 만났다. 그것도 무려 35년 만에. 내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은도를, 포항 선린 병원에서 만날 줄이야.
아들이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하여 사경을 헤맸다. 급한 위기를 넘긴 후, 두개골 봉합 수술하던 날이었다.
수술실 보호자 대기실에서 마음 갈피를 잡지 못하여 떨리고 두려웠다. 시간은 느려터지도록 천천히 갔다. 답답하여 숨 막힐 것 같았다. 은도는 책 몇 권과 산딸기를 사들고 내게로 왔다. 내가 산딸기를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산딸기 제철이 되면, 남편이 종이컵에 담긴 산딸기를 사다 주곤 할 정도였다. 은도는 많은 과일 중에 어떻게 산딸기를 딱 골랐을까?
아들 수술 중에 은도와 해후했다. 은도를 만난 반가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날은 슬픔 한 스푼에, 반가움 한 스푼이 섞여 소소(so-so)했다.
* * * * * *
은도를 처음 만난 것은 여고 2학년 때였다. 1학년 때는 동급생 입주 과외를 하느라 친구 집에서 지냈었고 2학년 때부터는 자취를 했다. 자취생이 되니 맘이 뒤숭숭했다. 어정쩡한 맘도 달랠 겸, 고향에서 다녔던 교회 생각이 나서 가까운 교회를 찾아갔다. 그 교회에 중, 고등학생이 30~40명 정도 됐다. 학생회 회원들 중에 1학년은 꽤 있었지만 2학년 여학생은 달랑 나 혼자 뿐이었다. 1학년 학생회 여자 부회장, 은도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때때로 기도회를 인도하거나 단합 대회 등을 추진했다. 마치 큰 집안의 안주인처럼 일을 도맡아서 척척 잘 해냈다.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찬양했고(은혜롭게 찬양한다,라고 한다.) 미주알고주알, 깨알같이, 간청하는 기도를 곧잘 했다.
교회 입구에 교육관이 있었다. 그곳에 들어서면 끄트머리에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었다. 지하실은 학생회실이었다. 학생들은 매일 교회에 왔다. 학생회실에서 기도회를 가지거나 다른 다양한 활동도 했다. 때로는 불을 소등한 채, 통성기도를 와글와글 해대기도 했다. 은도는 무릎을 꿇고 꼿꼿하게 앉아서 오랜 시간 중얼중얼 기도했다. 은도가 하는 기도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과 무척 가까운 듯했다. 은도는 기도하는 중에 때때로 훌쩍훌쩍 울기도 했다. 중간중간에 청아한 목소리로 찬양을 하기도 했다.
은도의 그런 모습은 내게 자못 충격이었다. 은도처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인가 보다,라고 여겼다. 신앙 정체성도 없었고 감수성은 예민할 대로 예민했던 여고 시절이라 은도를 벤치 마킹하고 때로는 패러디했다. 마치 아기 오리가 엄마를 따라 뒤뚱뒤뚱 걷듯이, 나는 은도의 모습을 은연중에 모방했다. 내 눈에, 은도는 만능 엔터테이너로 보였다.
그런데 은도는 우리랑 다른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인문계 고등학교가 아닌 실업계 여상을 다니고 있었다. 낮에는 직장에 다니고 밤에 학교에 간다고 했다. 은도와 말을 섞어본 기억이 거의 없고 친밀하게 지내지도 않았다. 있는 듯 없는 듯, 숫기 없이 교회에 다녔던 내 존재를 은도는 몰랐으리라.
학생회 수련회를 갔다. 은도가 수련회 기간 동안에 학생들이 먹을 밑반찬과 각종 먹거리를 챙겼다. 일처리 하는 모양새가 어른 못지않았다. 그 수련회 한 끼는 수제비였다. 어라, 그런데 은도가 수제비를 끓이는 법이 그때까지 내가 봐 왔던 것과 좀 달랐다.
어릴 때 할머니가 종종 수제비를 끓이셨다. 블록 담벼락 밑에 양은솥을 내다 걸고 밀짚으로 불을 지폈다. 박바가지에 담긴 수제비 반죽은 물컹물컹했다. 물 담은 대접을 곁에 두고 수제비 한 조각 뜯어 넣고 손 한번 물에 담그며 반죽을 줄줄 당겨서 뜯어 넣었다. 반죽 조각이 밀짚에 떨어지기도 했다. 그것이 구워져서 과자처럼 되면 서로 먹으려고 아우성친 적도 있다.
그런데 은도는 할머니가 하셨던 수제비 반죽과 사뭇 다르게, 만두피처럼 되직하게 했다. 심지어 손에 반죽이 달라붙지 않아 따로 물 대접을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반죽 조각을 넓은 채반에 조각조각 뜯어 놓았다가 육수가 끓을 때 집어넣었다. 그 이후로, 은도가 했던 식으로 되직하게 수제비 반죽을 한다.
나의 수제비 레시피다.
- 큼직한 볼에 소금간이 된 물로 밀가루 반죽을 한다. 밀가루와 물이 어느 정도 뭉쳐지면 10분 정도 치댄다.
- 그 뭉텅이에 물을 약간 두른 후에 랩으로 감싼다.
- 냉장고에 15분 정도 숙성시킨다.
- 수제비 육수는 다시마, 멸치로 낸다.
- 육수를 걸러 담은 냄비에 애호박, 당근, 소금, 국간장, 다진 마늘을 넣고 팔팔 끓인다.
- 반죽을 살살 얇게 펼쳐 적당한 크기로 뜯어 채반에 가지런히 놓아둔다.
- 육수가 끓으면 채반에 뜯어 두었던 수제비 반죽 조각을 넣고 양파, 새송이 버섯 등도 넣는다.
- 한 솎음 끓어 수제비가 동동 떠오르면 다진 고추, 대파 등을 넣은 후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떨어뜨린다.
수제비는 언제 먹어도 맛있다. 둘째를 임신하여 만삭이었을 때, 매일 수제비를 끓였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아들은 예정일보다 15일이나 늦게 나와 초조했을 때, 수제비를 먹으며 출산을 기다렸다. 임산부가 수제비를 좋아하니 딸내미와 남편도 덩달아 좋아했다. 평생 먹을 수제비를 그때 다 먹은 듯하다. 은도표 수제비는 내 별미다.
어느 날, 은도가 부산으로 가게 됐다고 했다. 학생회는 은도를 보내는 송별 예배를 드렸다. 그때 부른 찬양이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라는 것이었다. 그 찬양은 내 감정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3절을 부를 때는 내 애간장이 끊어지는 듯하며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었다. 헤어지면, 영원히 못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렇게 서러움이 북받치는 이별은 처음이었다. 그 이후에도 그만큼 울며 누군가와 헤어진 기억이 없다. 좋아하는 것을 잃는 아픔은 참 쓰라렸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위태한 일 면케 하고 품어 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때까지 계심 바라네(3절)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마치 초상난 듯이 엉엉 울었다. 아무리 멈추려고 해도 울음이 그쳐지지 않았다. 그에 비해, 은도는 감정을 잘 추스르고 학생회 앞에서 조곤조곤 송별사를 말했다. 생긋 웃기까지 하며 끝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뭐지? 울기나 했던 나는 어린아이 같았고 은도는 어른이었다. 감정을 잘 억누르며 할 말을 다 할 수 있다고? 역시 은도는 은도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은도 어깨너머로 학생회 일처리 하는 것을 익힌 나는 은도가 떠난 자리에서 그 일을 대신했다. 호랑이 없는 곳에 여우가 왕노릇 한다는 말과 엇비슷했다. 수련회에 은도처럼 먹거리를 챙기며 학생회 회원들의 식사를 도맡았다. 고3이었지만 교회 일에 빠져 공부는 뒷전이었다. 공부를 제대로 했더라면 내로라하는 대학도 갔을 텐데, 은도를 쉐도잉 하느라 바빴다. 아무런 준비 없이 시험을 치곤 했다. 다행히 국, 영, 수 성적은 크게 곤두박질 치진 않았다. 국, 영, 수는 과목당 만점이 50점이었는데 다른 과목은 대부분 과목당 만점이 10점이었다. 나머지 과목 중에서 10점 만점을 받은 애들이 의기양양해할 때 내 성적은 겨우 4~5점이었다. 그래서 코가 쭉 빠져있다가, 국, 영, 수 점수를 40점 이상 받아 합산하면 종합 성적은 그다지 비참하지는 않았다.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이웃에 있는 3개 교회 대학부가 연합하여 개최하는 수련회가 있었다. 참가 학생은 100명이 넘었다. 그 참가자들의 먹거리를 내가 책임지게 됐다. 물론 파를 자르거나 감자를 까는 일 등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했다. 그러나 메뉴를 정하거나 주방 제반사항 책임자는 나였다. 냉장고도 없던 시절이라 수박이나 김치는 샘물에 담가 두어야 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이리 누워 생각하면, 음식이 남을 것 같고, 저리 누우면, 음식이 모자랄 것 같았다. 계획형이었기에, 한 끼를 해결하고 나면 곧바로 그다음 식사 걱정으로 전전긍긍했다. 아무튼 무사히 수련회가 끝났다. 물론 은도표 수제비도 한 끼 내놓았다.
"학생의 이름을 오늘부터 '대모'로 바꿔야겠어."
수련회 기간 동안에 먹거리 챙기느라 강의 참석도 제대로 못했다. 그런데 수련회가 끝나고 기도원에서 내려오는 길에, 강사로 오신 교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자네는 큰 어머니야. 어떻게 많은 사람들의 먹거리를 척척 준비해 낼 수 있어? 대단해. 하나님이 크게 쓰실 거야."
'사실, 이거.. 후배, 은도한테 배운 거를 흉내 냈을 뿐이에요.' 나는 속으로 말했다.
살면서 은도 생각이 종종 났다. 그러나 내 삶이 바빠 은도를 찾아볼 엄두를 내진 못했다. 은도를 향한 짝사랑은 질기고도 오래갔다. 한 번 좋아했던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사람을 짜다리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은도만은 예외였다.
세월이 무심하게 흘렀다. 은도는 갈래 머리 여고생 모습에서 벗어난 중년이었다. 은도는 그즈음에 포항에 살고 있었다. 건너 건너 우리 아들 사고 소식을 전해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은도를 해후하는 자리가 하필 병원이라니. 내가 가장 힘들어하고 있던 때에 은도를 만나다니.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이라는 노래 구절처럼 나는 결국 그리운 은도를 만나긴 했다. 여전히 눈웃음을 생글거리며 낭랑한 목소리로 다가온 은도. 은도가 나를 기억한다는 것이 내게 영광?이었다. 그런데 은도의 삶에 걱정이 있어 보였다. 세상에 걱정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만은 당장 말하지 못하는 속내가 있어 보였다. 몹쓸 놈의 나의 촉, 틀려 버려라.
그렇게 만났던 은도와 헤어진 지 또다시 13년이 흘렀다. 세월은 LTE보다 더 빠른 5G 급이다. 은도를 만난 그 이후의 이야기는 이미 발행되었던 '교회 후배, 은도'라는 글에 있다.
사람 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리워하면서도
만나지 못했던 사람을
어느 순간에 만나기도 하는 게
인생이라면
그 인생 참, 쫄깃하다.
수제비에 관한 글을 발행한 적 있다. 은도가 하는 방식으로 반죽을 했더니 꼬들꼬들 식감이 좋았다.
https://brunch.co.kr/@mrschas/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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